'본인의 취향'에 해당되는 글 65

  1. 2004.05.21 왜들, 그렇게도, 경험으로 진리를 찾기를 두려워한답니까?
  2. 2004.05.07 [시]저 너머에 -윤제림
  3. 2004.05.07 [시]사랑의 기교 1 - K에게 -오규원
  4. 2004.03.14 전여옥 vs. 유시민
  5. 2004.02.08 인디언 달력
  6. 2004.01.02 한밤중의 기차에 대해서 -하루끼
  7. 2003.12.08 로타 볼레 (lothar wolleh)
  8. 2003.12.08 프리다 칼로 회화 모음
  9. 2003.12.08 프리다 칼로 2
  10. 2003.12.02 감정목록과 감정

왜들, 그렇게도, 경험으로 진리를 찾기를 두려워한답니까?

황신혜밴드 리더인 김형태씨가 자신의 홈피에 남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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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형태님께 카운셀링 의뢰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입춘이 지났건만 아직도 키보드를 치고 있는 제 손꾸락은 차갑기만 합니다.
김형태님께서는 몸건강하시겠지요.

다름이 아니오라 요즘 사회적 이슈인 '이태백' 의 일원인 본인의 넋두리를 들어주십
사, 더불어 형태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이렇게 얼어붙은 손꾸락을 움직이고 있습
니다.

저는 지방대 디자인학과 졸업예정이고 다른 이태백 일원들과 마찬가지로 여러군데
이력서를 넣고 있는 와중입니다. 연락오는 곳은 별로 없고 무언가 불안하면서도 편안
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고 있지만 솔직히 제가 무엇을 하고픈지 알수가 없습니다. 원래
의 전공인 제품디자인을 하고 싶다가도 디스플레이를 하고 싶기도 하고 영화공부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제품디자인을 하자 라고 하면 평생 영화공부는 커녕 영화찍는
것도 구경하지 못할 듯하고 영화공부를 하자고 하면 학교다닐때 했던 과제들의 즐거
움이 떠오릅니다.

일단은 먹고 살아야하니 직장을 다녀야 할듯해서 계속 이력서는 넣고 있지만 만약
회사에 다닌다면 영화공부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영화에 미쳤다든가 비
범하다든가 하는 인간극장에 나올법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회사에 다니면
서 다른 것을 병행하기란 힘이 들 것 같습니다.

아 정말 모르겠습니다.
올해 후반에 있을 영화교육기관(?) 시험을 보고싶은데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 매달
려야할까 아니면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히 해야할까. 그렇다고 영화라는 것이 내 평
생 직업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힘들고 배고픈 그 직업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
는 것은 아닐까나. 또한 4년동안 했던 디자인은. 대체.

기대를 걸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제가 하고 싶
은 것을 하도록 놔두시겠지만 그래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께 조금이라
도 호강을 시켜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마는 그 \'안정된\'직장생활의 끝에는 나의 꿈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백수가 되어 이것저것 가릴때는 아니지만 신중하고 싶습니다. 섣불리 조금 앞만 바라
보고 결정했다가는 나중에 후회 할 일들이 이만저만이 아닐것 같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기를 일단은 취직을 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영화쪽이나 디자인 쪽으로 유학을 가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but 회사를 몇년
다니면 유학을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영화교육기관에는 들어갈수 있을까. 라는 생
각이 부메랑처럼 또 따라옵니다.

횡설수설 앞뒤 안맞는 소릴 해댔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이 행복한 고민일까요. 어쩌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하는 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많이 사신 형태님께서는 지금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형태님의 나이가 되어
서는 그때 나 정말 잘했어 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앗 이것은 자기소개서 끝에 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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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당신은, 요즘 20대 청년실업자의 전형입니다.
20대가 왜 그렇게 취직하기가 어려운 줄 아십니까?
사람들은 불경기라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20대들이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 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
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들도 모두 못
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하는 것은 할 자
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떡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수 있을까
만 궁리합니다.

20대가 그런 식이니까 사회가 무기력해지고 경제가 침체되어 불경기가 오는 것이죠.

그럼 세상은 어떤지 이야기 해드리죠.
취업문이 좁다고들 난리지만, 사실 모든 회사에서는 새로운 인재가 없어서 난리입니
다. 세상은 자꾸 변해가고 경제구조도 바뀌어가니까 새로운 젊은 인재들이 회사에 들
어와서 젊은 피를 수혈해줘야 하는데 이력서를 디미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고 일에 대한 열정도 없이 그저 돈만 바라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회사입장에서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조금만 더 나은 봉급을 주는 직장이 나타나면 미
련없이 회사를 그만둘 사람들로 보이고, 또 그들이 기대하는 젊은 혈기와 창의력도
없이 누구나 학원 좀 다니면 딸 수 있는 뻔한 자격증만 잔뜩 가지고 오죠.

그래서 요즘 회사들은 신입사원 최우선 기준이 '충성도'랍니다. 이말인즉슨, 너희는 그냥 시키는 일이나 로보트처럼 한다면 일자릴 주겠다.는 뜻이죠. 개성과 창의력은 포기하고 잡부나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20대들은 자신들이 신세대이고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겠지만, 사실,
회사나 산업현장에서 당장 필요한 능력은 그런 겉멋이나 추상적인 감각이 아닙니다.
그리고 직장은 돈을 벌자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당신처럼 하고싶은 일은 따
로 있으면서 단지 돈만 바라보고 원하지도 않는 직장에 입사원서를 내는 것을 회사
중역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500명 1000명이 와도 뽑을 사람이 없는 것이죠.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원하지 않습니다.

20대가 취직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특별히 할줄 아는 일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른들은 그 사실을 면접때 눈빛만 봐도 다 알아봅니다.

그리고, 나약한 의지박약에 굴리는 잔대가리가 문제입니다.
당신이 쓴 글을 보십시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저걸 하면 배고플
거 같고, 이걸하면 잘 된다는 보장은 없고 돈도 벌고싶으니 취직도 하고싶은데 직장
은 재미없을 것 같고.... 그 와중에 대학원엘 갈까 유학을 갈까... 편안한 학생신분만
연장하려고 하고, 대체 뭘 하고싶다는 것입니까.

당신의 진로문제를 짧게 정리해보면, '하고싶은 건 많지만 고생해가면서 까지 꼭 해
야할 건 아니고, 그냥 먹고살게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도 않거
니와 또 시시할 거 같아요' 입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주는 회사는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만든 영화가 감동스러울 수 없고, 그런 사람이 기획한 디자인이
아름다울 리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20대들이 그렇게 많은 자격증과 명문대 졸업장과 수백장의 입사원
서를 들고 뛰어 다녀도 취직이 안되는 이유이고, 나라의 심장부가 그 모양이니 이 나
라의 경제가 침체되고, 장기 불황이 시작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신들은 잘못된 교육탓으로 돌립니다.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동정표 한장!
하지만, 교육이 엉망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당신들의
부모나 선배들은 더 발전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고 배워야합니다. 훨씬 열악한
환경 안에서 훨씬 일찍 철이 들고, 나라를 발전 시켰으며 그 와중에 나름대로의 문화
생활도 영위했습니다. 남탓, 시대탓, 환경 탓하는 것만큼 구제불능의 바보는 없습니
다.

참고로, 아시아 모든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청소년의 어른에 대한 공경심 조사에
서 꼴찌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른을, 선배를, 과거를 존경하지 않는
젊은이는 원대한 꿈을 가질 수 없습니다.

꿈과 희망이란, "나도 저 누군가처럼 될테다." 하는 동경에서 시작되는 것이거든요.
당신들의 큰 바위 얼굴은 누구입니까? 그런 게 있습니까? 오직, 자기자신과 돈에 한
동경만 있지않은가요?

섣불리 결정했다가 나중에 후회할까 두렵다고요?
왜 해보지도 않은 일을 후회할 걱정부터 합니까? 보지도 않은 영화를 재미없을까봐
포기하고,
가보지도 않은 여행지에 볼 게 없을까봐 안 가기로 하고, 저 요리가 맛이 없을까봐
안 먹고... 사는 건 대체 뭘까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정말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지, 디자인은 또 얼마나 훌륭
하게 할 지, 회사를 다니면 얼마나 뛰어난 업무능력이 발휘될 지, 당신이 어떻게 해보
지도 않고 침대위에서 그 짧은 인생경험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양다리에 삼발이에 문어발로 온갖 일에 맘을 다 걸쳐놓고 실제로 하는 일은, 해본 일
은 하나도 없으니 불안할 수 밖에요.
'하고싶은 일이 많다는 행복한 고민'이요? 웃기는 자위입니다.
'내가 뭘 할줄 알고 뭘 하면 행복해 하는 인간인지 이 나이 먹도록 하나도 모르겠어
요.'로 들리는 헛똑똑이의 넋두리로밖에 안들립니다.

좀더 신랄하게 당신의 심리를 파헤쳐보자면,
영화를 하고 싶다는 것은 현실도피성 희망입니다. 솔직히 디자인도 최고로 잘할 자신
이 없는것이죠.
자신의 전공쪽으로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사실 나는 디자인보다 영화에
관심이 훨씬 많다. 그래서 늦게라도 영화공부를 다시 한다.' 라는 상황에 대한 알리바
이를 미리 준비해두려는 것이죠.

취직이 계속 안되는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입사원서 던지다가 어디
좋은데 운 좋게 취직되면, 당신은 이러겠죠.
"먹고 살아야하고, 부모님께도 효도하려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디자인과 영화를 포기
했어." 그냥 나약한 생활인일 뿐인데 어느새 순교자로 승화되는거죠.
그 좋은 머리를 그런 자기합리화에 쓰기에 바쁘니 뭘 하나 똑부러지게 실천하겠습니
까.

내 말이, 억울합니까?
그럼 실천해 보십시오.
우선, 근무조건이 좀 열악한 직장을 선택해서 취직을 하세요. 그럼 금방 취직됩니다.
봉급도 좀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자기 한입 먹고 살만큼은 줄 겁니다. 그리고 20년
계획으로 영화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세요.

용돈을 쪼개서 모으고 모아서 캠코더를 사고... 컴퓨터를 사서 편집장비를 마련하고 (왠만한 PC로 다 가능합니다) 책을 사서 읽고, 주말에 영화 관련 포럼에 찾아 다니
고, 틈틈히 시나리오를 쓰고, 휴가때는 비디오 영화를 만들어 보고, 이 모든 것은 직
장 다니면서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20년 계획으로 꾸준히 하면, 습작이 꽤 될거고, 시나리오도 몇편 나올 겁니
다. 디자인 공부한 건 영화에 고스란히 활용될 거니까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그
렇게 해서 40대가 되면, 당신은 어느새 다니던 직장에서 직위도 올라가있어서 월급
도 꽤 되고 어느새 안정된 직장이 되어있으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에 경쟁자가
없으리 만큼 탄탄한 준비를 가진 40대 신예 영화감독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럼 바로 성공이냐? 아니죠. 입봉하고 나서 한 10년 현장에서 시행착오도 겪고, 기
대도 받았다가 실패도 했다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진정한 실력을 쌓습니다. 앗 어느
새 50대가 되었네요. 여러분들은 이정도되면 인생 쫑났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나이먹고 알고보면, 세상은 어른들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30년 줄기차게 정진해서
60가까이에 걸작을 하나 남길 수 있다면, 당신은 최고로 멋진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인
생은 결과보다 과정에 더 많은 가치가 있으며, 결과까지도 좋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
는 것이거든요. '인생은 60부터' 란 말에는 삶의 커다란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후줄근한 직장에 다니면서 20~30년이나 투자할 만큼 영화를 그 정도로 갈구한 것
도 아니거든요.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저렇게 할 수 없는 피치못할 적당한 구실을 찾느라 머리를
쓸 뿐이죠.
벌써 몇가지 변명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죠.

결국 자기 인생에 변명을 만드느라 젊은 날을 허비하고 있다면 참 암울할 뿐입니다.

당신들, 정말, 왜들, 그렇게도, 경험으로 진리를 찾기를 두려워한답니까?



* 한 개인의 카운셀링에 대해 어느새 '당신들'이라는 복수형이 되고, 이렇게 정성들여 장황하게 답변을 올린 것은, 정말이지, 청년실업의 주인공들인 20대들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까닭입니다.

[시]저 너머에 -윤제림

저 너머에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나갔는데,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윤제림>

[시]사랑의 기교 1 - K에게 -오규원

사랑의 기교 1 - K에게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게 당신을 사랑해 하며
아양을 떨고,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버스가 다니는 길과 버스 속의 구린내와
길이 오른쪽으로 굽을 때 너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훔치는 한 사내의 부도덕에게
사랑의 법을 묻는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취하는 법을 소주에게 묻는다.
어리석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취해야만 법에 통한다는 사실과
취하는 법이 기교라는 사실과
기교가 법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안하게도 술집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취해서 깨닫는다.

내가 사는 법과 내가 사랑하는 법을
낡아빠진 술상에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깨닫는다.
젓가락이 둘이라서
장단이 맞지만,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법은 하나뿐이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장단은 엉망이다.

강 건너 마을에는 후정화(後庭花) 노랫가락이 높고
밤에도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좌석 밑의 구린내와 지린내를 사랑하고
상여(商女)는 망국한을 몰라
노랫소리가 갈수록 유창해진다.

나는 이곳의 기교파로 울면서, 이 울음으로
몇 푼의 동냥이라도 얻어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여기 이렇게 울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

<오규원>


전여옥 vs. 유시민

'반지의 제왕' 칼럼 때도 알아봤지만 전여옥 정말 대단하다.
조갑제 이문열이랑 한 두릅에 꿰어서 수출하고 싶은 왕꼴통대마녀같으니라고.

++++


전여옥 "미숙아 盧는 인큐베이터로"
유시민 "매우 비열한 인용방식이다"
[지상중계] '탄핵정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사람의 승부는?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손병관(patrick21) 기자

▲ 칼럼니스트 전여옥(왼쪽)씨와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12일 밤 'SBS 대토론 이것이 여론이다'에서 처음 만나 열띤 논쟁을 벌였다.

ⓒ2004 SBS

동일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가장 치열한 비판논리와 지지논리를 설파해온 논객들이 '탄핵정국'이라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전여옥 (주)인류사회 대표와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그들이다.

전 대표는 노 대통령 비판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설가다. 지난 대선 당시에는 국민통합21 정몽준 의원 지지 입장이었던 전 대표는 대통령 취임 후 조선닷컴에 <그는 대통령이 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기쁨 못 준 대통령 물러나길>이라는 도발적 내용의 칼럼을 잇달아 기고해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유 의원은 작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기 전부터 각종 기고와 개혁적 국민정당 활동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해온 친노 진영의 대표주자. 유려한 글 솜씨는 물론, 토론에도 능해 TV토론프로그램에서 열린우리당 의원이 상대방에게 밀리는 순간에는 지지자들의 입에서 "이거, 유시민을 보내야 하는데…"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한다.

전여옥 "탄핵은 불치병에 대한 수술"

이 같은 화려한 이력(?) 때문에 이들은 어마어마한 안티 그룹들을 몰고 다니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12일 밤 방영된 'SBS 대토론 이것이 여론이다'에서 처음 맞닥뜨렸다. 이들은 탄핵안 가결 파문을 주제로 논쟁을 벌였지만 '진검승부'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이들 외에 4명의 패널(김용균 한나라당 의원, 김재홍 경기대 교수, 서영석 서프라이즈 대표, 최한수 건국대 교수)이 참여하는 바람에 1시간 50분간의 토론동안 두 사람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간헐적으로 서로간의 논점이 충돌하며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도 했다.

전 대표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전여옥 : 저는 보통 시민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노 대통령을 뽑지는 않았지만, 다수 국민이 선택했기 때문에 5년을 기다리고 인내하고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회견 보면서 그렇게 참을 필요 없겠구나. 이번 탄핵은 자연치유가 불가능한 병에 대한 수술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시민 : 일반시민의 입장에서 말하신다니까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어떻게 대통령이 모든 국민 마음에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탄핵이 문제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을 응징하는 수단으로 탄핵소추안이 적법한 가입니다.

전여옥 : 제가 묻고싶습니다. 유 의원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정치하는 거 아닌가요?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한 가장이 충격과 사회적인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한강에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나는 지난 1년간 대통령 걱정 많이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짜증이 난 유 의원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유 잘 안다. 그 비난이 다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대통령 험담하러 나온 자리가 아니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탄핵 소추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고 정당하냐는 게 문제의 초점"이라고 일갈했다.

유시민 "야당의 무한 권력욕, 미리 몰라 국민께 사과"

전 대표는 웃음을 지으며 "나는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고 한 수 물러서며 1라운드는 싱겁게 끝이 났다.

토론 중반 유 의원이 법적 근거를 들어 탄핵소추안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끄집어내자 전 대표는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것 자체로 가결되지 않았다 해도 대통령이 입은 상처, 도덕적 오점…. 이것은 온전한 대통령이 아니다"고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갑론을박은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우리당 지지율 상승은 변태적인 현상"
한나라 김용균 의원, 일반인식과 동떨어진 견해



전여옥 : 지금 유 의원님 말을 들으면서 참 어이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야당의 탄핵 얘기 이전에 시사주간지에서도 탄핵 시나리오가 있다, 이런 얘기 얼마든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국회는 여당이 개헌저지선도 없을 정도로 균형이 없는 야대여소 국회입니다. 그러면 항상 거기에 대해 대비를 해야하는 겁니다.

항상 거기에 대해 두렵게 생각해야 하고. 만에 하나 그런 것(탄핵)에 대해 생각을 해야하는 겁니다.

(유시민 의원, 눈을 부라림) 유 의원도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여기 있는 국회의원들이 다 그냥 국회에 들어온 의원들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왜 그것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고, 왜 그것이 이틀전이냐? 매우 방만하고, 국민의 뜻을 모르고 이 시스템에 대해 무지했던 게 아니냐? 저는 이렇게 봅니다.

유시민 : 네, 반성합니다. 야당의 그 무한한 권력욕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횡포함에 대해서 미리 충분히 지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반성하고 국민 앞에 사과합니다.

유 의원의 감정 섞인 비아냥이 돌아오자 전 대표는 순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야당에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지 말고 냉정하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김재홍 교수가 순간 끼여들어 "원내 다수정파라고 해서 대선 끝난 지 반년도 안된 시점에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국민이 대통령을 잘못 선택했다'고 얘기하는 건 괜찮습니까? 아무리 소수정권이지만, 국민들 요구가 있는데, 눈에 보이는 부패비리를 전략적으로 손대지 말아야 합니까?"라며 전 대표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전여옥 "국민들에게 지금 예쁜 당이 어디 있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를 만드는 해법을 놓고도 전여옥의 '여야 양비론'과 유시민의 '우리당 대안론'이 엇갈렸다.

전여옥 : 제가 잠깐 말하겠습니다. 저나 모든 국민이 대통령이 우리당 의원들에게 몸싸움 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대통령이 아니라 한나라당은 우리당과 (싸움을) 해달라? 국민들에게 지금 예쁜 당이 어디 있습니까? 지지하고 싶은 정당이 거의 없는 겁니다.

유시민 : 있습니다. 우리당은 높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전여옥 : 물론 그렇지만, 지지하는 정당 없다는 퍼센티지가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우리당이 마음이 들어서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한나라당 지지자도 한나라당이 너무나 예쁘고 고와서 지지하는 게 아닙니다.

복잡한 국민들의 심사를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모든 정치인들은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야당이 그렇게 무모한 탄핵발의를 하고, 탄핵가결까지 가기까지는 야당 나름대로 전략이 있었다는 것을 계산해야하는 것입니다. 왜 생각을 안 하고 몸으로,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까?

전 대표는 토론 도중 "나도 사실 이 정권 이전까지는 진보쪽 사람이었는데, 이 정부 들어서 보수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말하지 않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왜 보수가 되어야 하나? 왜 편가르기가 되고, '그들'이 되어야 하나?"고 반문하기도 했다.

토론 내내 이어졌던 두 사람의 신경전은 막판에 결국 격론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유시민 : 대통령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어떤 분이 평하기를 "노 대통령은 시대정신이 낳은 미숙아"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상당히 일리가 있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시대가 나아 가야할 바를 체현하고 있는 정치인인데, 좀 미숙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먼저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실수도 오류도 많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대통령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질 것입니다.

전여옥 : 대통령이 대통령직 수행에 무척 어려워했습니다. 또한, 매력 없는 직업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적어도 대통령직 수행을 위해서는 매력을 느끼고 직책의 위중함을 아는 사람이 대통령직 수행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또한 유시민 의원이 '미숙아'라고 말하신 대로 미숙아는 인큐베이터에서 키운 뒤에 나와야지, 제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시민 : 또, 저런 식으로 인용하시는군요.

전여옥 : 네, 아까 말하신 걸 듣고 제가 생각한 겁니다.

유시민 :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매우 비열한 인용방식입니다.

전여옥 : 제가 비열하다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회 맡은 염재호 교수가 '지금 논의가…'라며 말을 끊으려 하자) 저는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유시민 "국민 빙자말고, 전여옥 의견을 얘기하라."

유시민 :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 다 아니까요. 전여옥씨 생각을 얘기하세요. 대통령 나가라 그 얘기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죠?

전여옥 : 네, 그렇습니다.

유시민 : 저도 국민이니까요. 저는 대통령 절대 나가면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전여옥 : 유 의원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저는 또 받아들입니다. 유 의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고….

유시민 : 그러니까 국민을 빙자하지 마시고, 전여옥이 노무현 퇴진을 요구한다 이렇게 얘기해야죠.

염재호 : 정리합시다.

전여옥 : 아니, 국민의 한 사람인 전여옥은 노 대통령이 그렇게 버거워하시니까 그만하시는 게 좋겠다. 아까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걸 왜 자꾸 말꼬리를 잡고….

염재호 : 빨리 정리를 해주시고….

전여옥 : 국민들이 10년후 내 아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원하는 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결정하는 게…. 국민에게 공이 넘어왔다고 봅니다.

인디언 달력

1월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아리카라 족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수우 족

눈이 천막 안으로 휘몰아치늘 달/오마하 족

나뭇가지가 눈송이에 뚝뚝 부러지는 달/쥬니족 '

얼음 얼어 반짝이는 달/테와 푸에블록족

바람 부는 달/체로키 족



2월

물고기가 뛰노는 /위네바고 족,

너구리 달/수우 쪽

홀로 걷는 달/체로키 족

기러기가 돌아오는 달/오마하 '

삼나무에 .꽃바람·부는 달/테와 푸에블로족

새순이 돋는 달/키오와 족



3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체로키·족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퐁카 족·

암소가 송아지 낳는 달/수우 족

개구리의 달/요마하 족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아라파호 족



4월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블랙푸트 족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체로키 족

거위가 알을 낳는 달/샤이엔 족

얼음이 풀리는 달/히다차 족

옥수수 심는 달/위네바고 족 ·



5월

말이 털갈이하는 달/수우족

들꽃이 시드는 달/오사지 족

뽕나무의 달/크리크 족

옥수수 김 매주는 달/위네바고 족

말이 살찌는 달/샤이엔 족

오래 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아라파호 족



6월 ·

옥수수 수염이 나는 달/위네바고 족

더위가 시작되는 달/퐁카 족

나뭇잎이 짙어지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황소가 짝짓기하는 달/오마하 족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체로키·족



7월

사슴이 뿔을 가는 달/키오와 촉

천막 안에 앉아있을 수 없는 달/유트 족

옥수수 튀기는 달/위네바고 족 ·

들소가 울부짖는 달/오마하 족 . .

살딸기 익는 달/수우 족



8월

옥수수가 은빛 물결을·이루는 달/퐁카 족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쇼니 족

노란 꽃잎의 달/오사지 족

기러기가 깃털을 가는 달/수우 족

건조한 달/체로키 족



9월

검정나비의 달/체로키 족

사슴이 땅을 파는 달/오마하 족

풀이 마르는 달/수우 족

작은 밤나무의 달/크리크 족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10월

시냇물이 얼어붙는 달/샤이엔 족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키오와 족

양식을 갈무리하는 달/퐁카 족

큰 바람의 달/쥬니 족

잎이 떨어지는 달/수우 족



11월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크라크족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체로키 족

강물이 어는 달/하다차 족

만물을 거두어 들이는달/테와 푸에블로 족

작은 곰의 달/위네바고 족

.기러기 날아가는 달/키오와 족

모두 다 사라잔 것은 아닌 달/아라파호 족



12월

다른 세상의 달/체로키 족

침묵하는 달/크리크 족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수우족

큰 뱀코의 달/아리카라족

무소유(無所有)의 달/퐁카 족

큰 곰의 달/위네바고 족

늑대가 달리는 달/샤이엔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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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쉰다.

바람막이 없는 대평원에 앉아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인디언 기분'....푸파푸파

한밤중의 기차에 대해서 -하루끼

여자아이가 남자아이한테 묻는다.

"너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의 기적 소리만큼" 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날, 밤중에 문득 잠이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아마 두시나 세시, 그쯤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몇 시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그것은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알겠니.

상상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안 들려.

시계바늘이 시간을 새기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한테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장소로부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리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내가,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내가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아무도 모를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서,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야.

기압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그대로 찍히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알 수 있어?"

소녀는 끄덕인다. 아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괴로운 일 중의 하나일 거야.

정말이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고 싶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자 안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정말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비유 같은 게 아니야. 진짜 일이라고.

그것이 한밤중에 외톨이로 잠이 깬다는 것의 의미라고 그것도 알 수 있겠어?"

소녀는 다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렇지만 그대 저 멀리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먼 기적 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도 선로 같은 것이 있는지, 나도 몰라. 그만큼 멀리 들리거든.

들릴 듯 말 듯하다고나 할 소리야.

그렇지만 그것이 기차의 기적소리 라는 것을 나는 알아. 틀림없어.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기적 소리를 듣지.

그리고 나서 내 심장은 아파하기를 멈춰.

시계 바늘은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을 향해서 천천히 떠올라.

그것은 모두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렇게 작은 기적 소리 덕분 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거기에서 소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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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이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기적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로타 볼레 (lothar wolleh)

독일의 사진작가.
광고사진으로 시작해서 유명 예술가들의 초상사진과 바티칸 사진을 주로 촬영.
1979년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다.




rene magritte, brussels, 1967...






man ray, paris, 1967






josef beuys, stockholm, 1971






edward kienholz, berlin, 1975






nuns at st. peters square, vatican, 1975...






st. peters vatican, 1975






prayer, inside the vatican, 1975

프리다 칼로 회화 모음


나타샤 겔만Natasha Gelman의 초상, 1943,
캔버스에 유채, 30 x 23 cm, Collection J. and N. Gelman






내 치마가 저기 걸려 있다, 1933, 판자에 유채, 46 x 50 cm






color transparency, chromagenic development (Ektachrome)
24x36mm (35mm film in slide mount)
Gift of Mrs. Nickolas Muray






Frida Kahlo
self-portrait 1946
pencil on paper 38.5 x 32.5 cm






부서진 기동





버스





두여인





프라다 칼로의 일기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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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프리다 칼로의 성장 과정

3. 프리다 칼로의 회화적 특성

3.1. 주제적 측면에서의 자화상

3.2. 형식적 측면에서의 자화상

4. 칼로 자화상의 미술사적 의의

4.1. 초현실주의적 요소

4.2. 여성주의(Feminism)적 요소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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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멕시코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프리다 칼로'와 '루피노 따마요'... 그들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멕시코적인 것에 서로 애정을 기울였던 공통점을 가진 반면 서로 다른 영역을 추구했던 화가들이기도 하다.

프리다 칼로는 루피노 따마요에 비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의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기교적인 것이 아닌 솔직한 자아 표현에서 출발한 그녀는 힘있고 영감에 찬 작품들을 통하여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신만의 단어와 문장으로 된 작품 언어를 개인적으로 발전시켰다. 칼로에게 있어서 그림은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시작되었고, 주변의 사물들을 자신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의 근원은 끊임없는 자기 분석을 통한 고통받는 자아의 탐색과 함께 멕시코 혁명(1910∼21)후 식민지 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 멕시코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회복하여 그들 나름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데에 있다.

그녀는 멕시코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드러내며 작품의 형식적 틀을 아즈텍(Aztec)미술로 대표되는 Pre-Columbian시기의 조각품이나 식민지 시대의 토착문명과 결합된 미술, 그리고 대중 미술을 근거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미술은 이처럼 기본적으로는 멕시코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국제적 미술운동인 초현실주의 미술과 많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혁명 뒤에 수반되는 가치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멕시코의 화가로 그녀 자신을 그렸으며, 따라서 민족 정체성의 구현을 그림을 통해 실현시킨 화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독립적인 멕시코 문화의 강한 표현은 Pre-Columbian과 Hispanic 혈통을 아울러 작품 전체에 반영되었다.


2. 프리다 칼로의 성장 과정


프리다 칼로 칼데론(Frida Kalho Calderon)은 1907년 7월 6일에 멕시코 교외의 꼬요아깐에서 마띨드 칼데론과 곤살로 기예르모 칼로의 사이에서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난다. 멕시코의 식민지 시대가 지나고 30년의 디아스 장군의 독재정치가 이루어졌고, 혁명(1910~21)은 멕시코의 각 사회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일어났으며, 미래에 대해서 유토피아적인 시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

프리다 칼로는 그녀와 새로운 멕시코가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그녀는 혁명보다 3년 먼저 태어났지만, 그녀의 멕시코 혁명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는 자신의 출생 년을 항상 1910년으로 할 정도였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와 인디오와 스페인 혈통의 메스티소(Mestizo)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이중적 혈통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관심은 1936년에 그린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와 나>에서 그녀가 태어난 집과 가족의 계보를 그리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도표처럼 도식화시킨 일종의 그룹 초상화이다. 그녀의 외조부모들의 모습은 육지의 형상으로 상징화했으며, 반면 친 조부모들의 모습은 대양의 형상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칼로의 두텁고 모아진 인상의 눈썹은 그녀의 친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로의 이런 혈통에 대한 관심은 일생 동안 다루어지는 작품에 계속 영향을 주게 되고, 1950년대 초에 죽음을 앞 둔 그녀는 마치 강박관념처럼 이 주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

사진 작가였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고고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칼로와 함께 나누었으며, 사진기 다루는 방법 등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꼼꼼함과 세밀한 방식은 후에 그녀의 사실적인 화법에 영향을 주게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아버지의 초상>에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1913년 6살 때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려서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쇠약해진 다리는 평생동안 이어진 고통과 강박 관념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는 멕시코 독일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22년에 국립 예비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국립대학예비학교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혁명 이 후 진정한 Mexicanism으로써의 열망이 가득한 교육의 현장이었으며, 칼로는 총 2000명의 학생 중 처음 들어간 35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의대에 들어가기 위한 연구 과정을 선택하였으며, 그림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1925년까지 그녀의 예술적 격려는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그림을 배운 일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했으나, 그때의 칼로는 예술가란 직업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너무나 큰 계기로 인하여 곧 바뀌게 된다.

1925년 9월 17일 그녀의 남자친구 고메스 아리아스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고 가던 버스와 전차가 부딪치는 사고가 나는데 이 때 그녀가 입은 골반과 척추의 부상은 일생동안 그녀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1년 후에 연필로 스케치한 작품 <사고>는 그녀의 일생을 변화하게 한 치명적인 사건에 대한 회고를 그린 것으로 이 드로잉은 칼로가 사고에 대한 시각적인 증언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며 그녀의 작품에 있어 그 주제는 단 하번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다루어지지 않게 된다.

사고 후 아버지의 따뜻한 격려로 병원 침대에 거울을 달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칼로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볼 수 있었고, 스스로가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칼로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시초이다. 그녀의 첫 번째 자화상인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과 그녀의 초기의 친구들과 여동생의 초상화들은 19세기에 유럽화의 영향을 받은 멕시코의 화풍에 그 기원을 둔다.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은 남자친구인 아리아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하여 그려진 것으로 그녀의 우아한 귀족적 자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품들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1928년과 29년 사이에 제작된 <내 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과는 많이 다르다. 후자에서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영향을 받은 듯한 양식과 주제성이 엄격하고 딱딱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통적으로 이 시기의 작품들은 멕시코주의로 대표되는 후기작들과 상당히 다른 경향을 띠고 있다.

칼로는 1928년 이태리계 미국인 사진작가이자 좌익계 활동가였던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에 입당한다. 여기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되는데 사실 1922년에 국립예비 대학교에서 이미 디에고 리베라가 벽화 제작할 때 만 난적이 있다. 리베라는 칼로가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예술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켰다. 리베라의 관념적인 영향은 그녀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고 1929년 8월 21일에 프리다 칼로는 그녀보다 21살 연상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칼로의 1929년 작 자화상 <Time flies>에서 그녀는 간단한 옷차림 식민지적인 귀걸이와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복이전과 같은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영향이다. 그녀는 멕시코 문화를 느끼면서 진정 멕시코 여인의 뿌리는 인디언과 스페인 계의 혈통의 혼합이라고 주장한다. 이 그림은 그녀의 민족적인 자각에 대한 표현이 되었고, 무색과 희색, 그리고 빨간 색인 멕시코 국기의 색깔이 전체적으로 칠해졌다.

<Time flies>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을 비교해보면 확실한 차이가 난다. 후자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반영하고, 자신을 귀족적으로 묘사하고 약간은 우울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광채로 넘치며 관객을 긍정적으로 확실한 눈으로 쳐다보는 결의에 찬 표현들을 나타낸다. 또한 벨벳의 우아한 드레스를 간단한 면 블라우스로 대치한다. 그녀는 첫 번째 작품 이후 그림을 통해서 삶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Time flies>에서의 극적인 자기 평정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 이였던 것이다.

칼로는 이상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웅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리베라와는 달리 주변의 세계에서 소재를 취했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항상 현실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어 생생한 경험의 직접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버스에서>는 사회계층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멕시코 사회의 전형적인 사회 계층들이 버스 안의 옆자리에 서로 앉아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인 계층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프리다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디에고의 잦은 외도와 허약한 몸으로 괴로워하다가 두 사람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이혼을 한다. 그러나 프리다는 리베라와 헤어져서는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괴로워하다가 결별한지 1년도 채 못되어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된다. 그러나 리베라는 여전히 불성실한 남편이었고, 이후에도 그는 칼로의 정신적 고뇌의 주된 원인의 제공자였다. 1943년의 <테후아나 의상을 걸친 자화상>에서 테후아나 지방의 전통의상을 착용한 칼로가 이마에는 리베라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는 이미 소유 불가능한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보인다. 칼로의 고뇌는 <디에고와 나(1949)>에서 절정을 이룬다. 항상 정성스럽게 빗은 후 머리 장식용 멕시코 전통 액세서리로 단장한 그녀의 머리는 드물게도 자신의 목을 휘감아 교살하려는 듯 풀어헤치고 있고, 그녀의 당황한 얼굴에서는 눈물 방울이 보이고 있다. 대체적으로 리베라와 재결합을 한 1940년 이후의 자화상에서는 이전에 보이던 불성실한 남편에 대한 분노와 도전의 이미지가, 체념과 모성적 관대함으로 대체되어 순화되어 있어 칼로의 심리변화를 엿볼 수가 있다.

프리다 칼로 에게 1950∼51년은 잔인했다. 오른쪽 발의 회저병 초기 증세 때문에 발가락 절단 수술을 해야 했다. 영국 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다가 세균이 감염되어 6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고통을 위로하며 리베라가 옆에서 지켜주었지만 프리다는 지쳤다. 이때부터는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자화상의 일괄된 주제가 된다. 그녀의 그림은 육체적 고통을 이기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53년 초 칼로가 너무 쇠약해져서 디에고는 서둘러 미술협회가 주관하기로 한 그녀의 회고 전을 앞당기고 프리다를 위한 축제를 열어주기로 결심한다. 1953년 4월에 프리다가 너무 쇠약해져서 전시회를 취소하려고도 했으나 병원차를 타고 전시회에 참가를 하여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1954년에는 프리다의 건강도 잠깐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이때 보편적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해 디에고와 함께 투쟁하여 새로운 미술 세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듯 보였다. 이때 그녀는 마르크스와 스탈린 이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그녀 작품으로 유일하게 혁명적인 작품을 그린다. 6월 2일 그녀는 집회에 디에고와 집을 나섰다가 소나기를 맞아 아직 완치되지 않은 폐렴이 재발했고, 프리다는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프리다는 6월 13일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디에고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3. 프리다 칼로의 회화적 특성


'나는 항상 혼자였고,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인 자화상을 그린다'라고 프리다 칼로가 말했듯이 그녀는 병원에 있는 동안 거울을 통하여 심도 있는 자기 분석을 할 수가 있었다.

칼로의 그림은 그녀가 죽기 바로 전에 주로 그려진 몇 점의 정물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이며, 이중에서도 전 작품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55점 정도의 그림이 자화상으로 되어 있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로 여기서 투영되는 육체적인 자아와 정신적인 자아를 동시에 표현한다. 구체적으로 칼로는 자신의 자화상에서 하나로 고정된 자아가 아닌 여러 층의 자아의 모습을 탐색하며 20초반 멕시코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여성으로서 부딪쳐야 되는 현실을 고백한다. 한편 그녀는 당시 혼동과 더불어 희망으로 가득차 있던 멕시코 사회에서 의식 있는 지식인으로서, 멕시코의 역사를 그녀 특유의 개인적인 방법으로 그린다.


3.1. 주제적 측면에서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의 작품의 일관된 중심적 개념은 고통이다. 수많은 자화상들은 그녀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녀가 선택한 도구였고, 따라서 근본적인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작품 제작의 일차적 이유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기록이다.

칼로는 어렸을 때부터 혼혈 혈통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고, 이것은 그녀가 죽는 해인 1854년까지 자화상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나의 조부모와 부모와 나>에서 그녀는 자기네 집 정원에 서있는 발가벗은 조그만 소녀로 표현되어 있고, 칼로의 오른 손에 있는 빨간 리본의 이미지는 이후에도 자신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유대감의 시각적 표현으로 보인다. 이런 자신의 혈통과 뿌리에 대한 관심은 1932년에 그린 <나의 출생>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충격적인 대담함을 보인다. 그림 속의 어린아이는 안으로 모아진 두터운 눈썹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칼로 자신임을 알게 해준다. 벽에는 비탄에 잠긴 어머니, 즉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흐느끼는 슬픔에 찬 마리아 상이 걸려있다. 한편 우아하고 담백한 색조와 벽과 베개의 핑크빛 레이스는 화면 전체의 긴장된 분위기와는 다르다. 사실 이 그림을 그릴 즘에 어머니가 죽었고, 결국 칼로 자신의 탄생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태어나지도 못한 그녀의 아기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 <유모와 나>는 연이어 태어난 동생으로 인해 유모의 젖을 먹고 커야 했던 그녀의 기억을 묘사하고 있다. 칼로는 성인의 얼굴에 어린 소녀의 몸을 하고 마치 마른 대지에 내리는 비처럼 젖을 먹고 있다. 결국 칼로는 멕시코의 대지의 여신을 상징하는 인디오 유모에 의하여 양육되어진 것이다.

1943년의 작품 <뿌리>는 <유모와 나>와는 달리 표현되고 있다. 전자에서는 자연에 양분을 제공하는 사람이 프리다라면 후자에서는 대지의 어머니 같이 생긴 식물의 가슴에 안겨 양분을 제공받는 사람이 프리다이다.

<헨리포드 병원>은 1932년 디트로이트에서 그린 것으로 피투성이 자화상 시리즈 중의 첫 번째 작품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이 작품에 대하여 '미술사상 전례 없는 일련이 걸작들로 여성의 가치를 질적으로 고양시켰다.'고 언급했다. 이 그림에는 고독감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표현을 수평선 쪽의 산업 사회의 풍경에 의하여 나타내고 있다. 칼로가 쥐고 있는 리본의 끈은 유산할 당시 그녀의 감정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물들로서 달팽이는 임신에 실패하게 되는 긴 유산의 과정의 상징이다. 또한 배경이 공장지대는 기술적인 진보의 상징으로서 화가 자신의 인간적인 운명과의 대조적인 특성을 표출하고 있다. 비록 그림에서 개인체험들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생활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는 칼로 에게 있어서 생동감 있는 사진과 같은 정확성보다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칼로의 '고통'은 평생 그녀 작품의 주제가 되어 그녀의 작품은 미술세계에서 다소 동떨어진 세계를 보이기도 한다.

40년대 이후로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주위를 많은 애완 동물이 나타나게 된다. 그 해에 같은 주제의 그림들이 다수인 것으로 보아 그녀가 다시 유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조그만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등에서 그녀와 연결된 실크 리본을 감은 애완 동물들이 나타나는데, 매우 절망적으로 보인다. 칼로의 원숭이는 포기한 아이들 역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프리다 칼로의 말년에는 절망적 내면을 일련의 정물화 작업으로 표현되게 된다. 일종의 결혼 초상화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구성은 전통적인 것에서의 차용이었는데, 그 기원은 18세기와 19세기의 멕시코 초상화들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이 그림은 그들 결혼 기념 사진에서 기초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부부가 과장된 표현으로 높이에서 차이가 나서 칼로는 바닥에 채 닿지 못하고 떠있는 모습이다. 리베라는 화가로서 드러나 보이지만 칼로는 뛰어난 화가의 평범한 부인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리베라의 결혼 전부터 계속되는 여성 편력은 결국 그의 벽화 모델이었던 칼로의 여동생과의 불륜으로 발전되고 칼로의 작품에는 변화된 자신을 표현되게 한다. 1935년에 그린 <곱슬머리의 자화상>에는 이전의 부드럽게 빗어 넘겼던 머리는 짧게 말아 올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고 있으며 <작은 자상들 (A Few Little Pricks)>에서는 부분적으로 선혈이 낭자한 본질로써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질투의 결과로 인하여 한 여인이 살해당한 신문기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런 무시무시한 실상의 표현까지도 그녀 자신의 개인적 상황의 견지에서 인식되어야만 한다.

<나의 탄생>, <작은 잔상들>같은 초기 작품에서는 그녀가 실질적인 고통이나 죽음을 표현한 반면에 <기억(memory)>에서는 정신적 고통의 상징으로서 육체적 상처들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그림에서 칼로는 멕시코 전통의상이 아닌 그녀가 실제로 가지고 있던 옷을 입고 짧은 머리로 오른발을 해변에 왼발을 바다에 두고 서있다. 칼로의 상처받은 발치의 거대한 심장은 샘처럼 피의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를 향해 계속 흐르고 있다.

1938년 미국의 화랑에서 첫 외국 전시회 이후 성공적인 전시회의 호평은 그녀에게 경제적 독립을 줄 수 있게 되며, 그 다음해에 그려진 <두 명의 프리다>는 두 가지 상반된 개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작품은 이혼한 바로 직후에 완성된다. 두 모습 중에서 실제의 프리다의 모습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후아나를 입고 있고 그녀 옆에서 그녀 자신의 분신으로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들 두 연인이 드러내놓고 있는 심장은 하나의 혈관으로써 연결되어 있고 혈관의 끝은 분리되어 유럽인 칼로의 드레스에는 피가 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녀가 환상과 꿈의 세계에서 살면 이 세계에서 자신을 빼닮은 이중인물을 설정함으로써 고독에 대한 보상을 찾는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의 자화상들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차이점들은 단지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나 소재에서만 구별되어지며 멕시코 대중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테후아나 의상을 입은 자화상>에서 칼로는 소유할 수 없는 리베라에 대한 자신의 강박관념 같은 집착으로 인해, 마치 덫과도 같이 그 이미지를 '생각'이라는 형태로 이마에 새겨 놓았고 1949년의 <디에고와 나>에서 그녀의 긴 머리는 저절로 목 부분으로 감아져 있으며 , 그녀를 목을 졸라 죽일 정도로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The earth, Myself, diego and senor Xolotl>에서는 그 이전까지의 절망적 심정을 소유가 아닌 모성의 관대함으로 순화된 칼로의 심리변화를 볼 수 있다. 이 작품 이후의 그림부터 칼로는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자화상에서조차 결코 감상적이거나 나기 연민에 빠진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금욕적이고 냉정한 표정 속에서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묵묵한 결의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자화상들이 강인한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솔직함과 기교가 한데 어울러져 있기 때문이다.

칼로의 이런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은 <부러진 척추>이다. 그녀는 나체로 꼿꼿이 서 있으며 코르셋이 그녀의 몸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몸은 척추에 의해 커다란 틈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뒷배경의 황폐한 풍경은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40년대가 끝날 무렵 그녀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조금 회복되었을 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정물화들은 정치적인 견해로써 읽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적 표현은 그녀가 1948년에 멕시코 공산주의 연합에 가입한 이래로 그녀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국기가 이 시기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 상태는 표현력까지도 방해하고 있어서 그림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거친 필치로 표현되고 있다.

1951년 작 <Self portrait with the portrait of Dr. Faril>이후로 정물에서의 색채와 리얼리즘은 그녀의 건강 악화로 인하여 극도로 쇠퇴해지면서 소재도 정물화가 많아지게 된다.


3.2. 형식적 측면에서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는 당시 멕시코의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과격한 입장을 취했으며, 이러한 자신의 사회, 정치, 역사적 신념체계에 의한 독창적 미학을 추구한 정열적인 국수주의자였다. 이런 점은 자신의 조국인 멕시코와 멕시코 사람들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면 특히 작품 제작에 있어서는 형식이나 내용의 차용에서 잘 보여진다.

혁명 후 많은 멕시코 미술가들이 그들의 미술을 좀 더 멕시코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그 시대의 벽화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멕시코적인 뿌리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프리다 칼로는 진정한 멕시코적인 화가이다. 칼로의 그림에서 주된 멕시코적인 뿌리의 기초는 주로 토착문명들과 독립된 문명이었던 아즈텍 시기의 미술이 그녀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디에고 리베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칼로의 작품을 가장 강력하며 현대 멕시코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나 역시 전적으로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프리다 칼로는 민족 미술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예술은 그 자체를 위한 것, 대중적인 미술로서의 순수함을 위한 미술이다.'

그녀는 정복이전의 원주민문화로부터 상상력을 끌었고, 자신만의 것을 얻었다. 그녀의 자화상에서 그녀는 소박하며, 인디안 풍의 의상을 입고 있으며, 토착민들의 정체성을 표출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칼로가 1937에 그린 <유모와 나>에서 유모는 가슴을 드러낸 채 벗고 있고, 콜롬비아 전기의 Teotihuancan 돌 가면을 얼굴 대신에 쓰고 있다. 유모의 모습은 토착적인 모신(母神)의 재현을 회상케 한다. 그리고 유모는 작가 자신의 멕시코 혼혈의 원류의 상징이다.

아즈텍 미술에서 중심이 되는 제사 의식에서 인신공양의 의미로 쓰이는 심장과 해골의 형상이 칼로의 작품 속에서 상징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죽음은 더 큰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칼로의 작품에서 핏빛 자화상의 심장의 이미지는 고통을 의미한다. <회상>에서 심장이 찢겨 있는 것은 고통의 강렬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다 작품 중에서 고대 멕시코의 신화가 특별히 정확하게 보여지는 작품은 <The Love embrace of Universe, The Earth(Mexico), Myself, Diego and Senar Xototl>이다. 여기서는 음과 양이 경계를 갖고있는 모습으로 그녀의 이중적 원칙을 묘사하고 있다. 낮과 밤이 서로 스며들며 음기와 가벼운 물질, 태양과 달, 우주의 원자형태가 어두운 지구를 그 강력한 팔로 끌어안는다. 대지의 여신은 자궁으로부터 생명을 낳고 있다. 또한 여신은 <나의 보모와 나>에서의 유모와 달리 칼로를 무릎으로 안고 있다.

1940년 미술평론가 마이어 사피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진정한 독창성을 지닌 뛰어난 화가이고, 필자가 알고있는 멕시코 미술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작품은 오로스꼬(Orozco)와 리베라와 견줄만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더 멕시코 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처럼 그녀의 작품에는 멕시코적인 민속 문화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4. 칼로 자화상의 미술사적 의의


4.1. 초현실주의적 요소


1920년대에 서구사회의 기존 가치체계에 도전하여 일어난 초현실주의 운동은 무의식의 세계 및 꿈의 세계를 표출해 보임으로써 정신적 해방을 이루어 참된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이 처음으로 칼로의 작품을 본 것은 1938년이었다. 그는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으로 보았고,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들이 창안한 여성의 구체화로 보았다. 브르통에게 있어 칼로가 여성 초현실주의자의 전형이 된 이유는 그녀가 재현한 작품 속에서 그녀의 환상적 분위기와 모델의 정신에까지 바친 그녀의 헌신이다. 관능성은 거의 섬뜩할 정도이고 평범함 위에 예술 작가의 꿈과 매력으로 치장된 유머와 잔인함은 작품의 구조를 형성한다.

비록 앙드레 브르통이 그녀를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했으나,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방법들로 형성된 양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상징들과 철학들을 즉 순수 초현실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그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냈다. 초현실주의가 대부분 꿈의 상태, 악몽, 그리고 정신적인 것들의 상징들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칼로의 작품은 위트와 유머로 되어있다

어쨌든 1938년에 있었던 초현실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촉 이후에 그녀의 작품에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Luther Burbank>는 칼로가 처음 1931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을 때 그려졌는데, 칼로는 초현실주의는 삶이 항상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여 그린 것이었다. 또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꿈의 주제는 <Dream>에서 보여지고 있고, 여기서 보여지는 해골의 이미지 또한 그녀가 꾸는 꿈이 죽음이라는 멕시코的 초현실주의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면 고통스런 모습 위에 초현실주의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고, 에로시티즘이 억압된 내면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칼로가 자주 사용하던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있거나, 상부가 열린 모습들은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의 작품의 여성적인 사고와 감정은 초현실주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Root>를 보면, 그녀는 독특한 개인적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을 갈망하는 칼로의 현실이었다. 그녀의 초현실주의적인 화상은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한 방법이었지, 리얼리티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하던 유모도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궤변적인 유모와는 달리 세속적인 냉소를 지닌 그녀의 유모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조롱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가 자신이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기도 했고 일부 작품은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의 범주에 포함되는 이유는 그녀가 초현실주의자들과 직접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시회에도 참가하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작품이 공상이나 환상, 꿈 등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내용이 심리적이며 상징성과 신비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분류되는 것이다.

그리고 멕시코 예술의 환상이 풍부한 것은 초현실주의보다는 더욱 오래된 멕시코의 전통에 의한 것이었다. 칼로의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는 그녀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4.2. 여성주의(Feminism)적 요소


페미니즘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여성주의 미술이 출현한 것은 서구에서는 1970년대이다. 칼로가 죽은 뒤에 미술사적 위치가 재조명된 시기도 이때이다. 칼로의 작품은 1954년에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외부세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1970년 초반이 되서야 일반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여성 해방론자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칼로가 비극적인 한 여성 해방론자이며, 제 3세계의 여성들에게 칼로는 위대한 본보기였다.

그녀의 그림이 여성이 지니는 고유한 현실과 이에 대한 체험을 그 누구보다도 포괄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칼로는 아주 이상적인 페미니스트 화가라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심각하게는 생각했지만, 화가로서 철저한 직업의식을 느낀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로 할 때 그림을 그렸으며, 그녀의 그림을 칭찬하고 창작활동을 격려했던 사람은 항상 리베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로가 영웅적인 페미니스트 화가가 된 이유는 그녀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신랄한 여성 이미지가 많은 여성들, 특히 여성 화가들의 커다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칼로의 자화상에서 그려진 여성은 남성의 시각적 만족을 위한 수동적 오브제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존재의 깊은 층을 탐구하는 능동적인 관찰자인 것이다.


5. 결 론


칼로의 미술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우선, 그녀가 남긴 미술 작품 자체보다도 그것의 주제가 되었던 그녀의 불운하고 극적인 생애와 이에 맞선 강한 삶의 방법이 '칼로 신화'를 만드는데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불의의 사고가 가져온 육체적인 불구, 이로 인한 평생의 고통, 그리고 불성실한 남편과의 결혼생활과 가질 수 없는 아이에 대한 강박 관념적인 집착 등, 특이한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바탕으로 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고백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고통'에 대한 인류 보편적인 존재적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 이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 항로는 칼로의 미술을 부수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서 작품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평가에 있어 장애가 되어왔다.

한 개인으로, 예술가, 혁명가로서 프리다 칼로의 생애는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여성 편력이 심한 남편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운명적으로 겪게 되는 고뇌와 자기 파괴적인 기질에 대해서 작품 속에서 실험적으로 다루며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의 절규가 들리는 듯한 그녀의 작품들은 평생 짊어져야 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피 흘리고 처참하게 찢겨진 상처투성이의 강렬한 자화상의 이미지를 통하여 여성 특유의 체험적 고통과 현실 속에 가려진 섬뜩한 진실을 보여주었다.

고통은 미술사에 있어서 그녀의 주된 주제였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극히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움을 지닌 칼로의 작품 세계는 여성주의 작가들의 계보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그녀의 현실은 대부분 리베라와 결속되어 있지만, 그녀는 리베라와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리베라의 벽화가 보다 이론적이고 진보적인 세계를 웅대하게 표현한데 비하여 칼로의 조그마한 작품들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서 개인적 삶을 포착하려고 노력하였다. 혁명 후 부각된 민족의 정체성을 작품의 기초로 한 그녀는 멕시코의 전통에 근거해서 아즈텍 미술로 상징되는 선 콜롬비아시기의 미술품들, 토착문명과 결합된 기독교 미술과 대중미술에서 형식적 틀을 빌어 작품 전체에서 주된 테마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있어 화면의 크기에 상관없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생전에 단 2번밖에 개인전을 갖지 못했던 칼로 이지만 그녀 생애 동안에는 초현실주의의 찬사를 받았고, 사후에는 페미니즘 운동의 부각으로 인하여 빛을 보게된 그녀는 다른 작가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출처 : 모름 (-_-;)

감정목록과 감정

List of acting emotions:

admiration 감탄, 찬양
desire 욕망
exhilaration 흥분, 들뜬 기분
impatience 초조, 참을 수 없음
relief 안심

adoration 숭배, 동경
despair 절망감
expectation 기대감
indifference 무관심
remorse 후회,자책

amazement 놀람, 경탄
desperation 절망
fascination 매혹
indignation 분개, 의분
resentment 분개

ambition 야망
determination 결심
fear 무서움
infatuation 심취, 홀리다.
respect 존경

anger 화
disappointment 실망
frustration 좌절
jealousy 질투심
revenge 복수심

anticipation 기대감
disbelief 불신, 의혹
greed 탐욕
joy 기쁨
serenity 평온, 침착

anxiety 근심
disgust 역겨움
grief 비탄
loneliness 외로움
shame 수치심

awe 경외심, 위압감
disillusionment 환멸
guilt 죄의식
lust 정욕, 갈망
shock 충격

bewilderment 당황, 어리둥절
eagerness 열의, 열망
hatred 미움
mischief 장난
sorrow 슬픔

boredom 지루함
embarrassment 부끄러움
hope 희망
panic 패닉
suspicion 의심

compassion 깊은 동정
enthusiasm 열정
hopelessness 절망감
pity 동정
sympathy 연민

contempt 경멸
envy 시기
horror 공포
pride 자존심
terror 심한 공포

curiosity 호기심
exaltation 기고만장
humiliation 쪽팔림
rage 분노, 격노

defiance 도전
exasperation 분노
hysteria 히스테리
regret  후회



그런데,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거나 망치는 것은 감정일까. 이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