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취향'에 해당되는 글 65

  1. 2003.02.14 에세이 <불>, 레이몬드 카버
  2. 2003.02.04 [시]저물녘에 중얼거리다 ㅡ 이문재
  3. 2003.02.03 [시]우물 ㅡ안도현
  4. 2003.02.03 [시]파도타기 ㅡ정호승
  5. 2002.10.07 [시]견딜 수 없네 ㅡ정현종
  6. 2002.09.24 [시] 더 쨍한 사랑 노래 ㅡ 황동규
  7. 2002.07.24 아르누보 시대 리뷰 -알퐁스 뮈샤
  8. 2002.07.18 [시]도끼를 위한 달 - 나희덕
  9. 2002.07.03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편지
  10. 2002.06.23 빨간머리앤 피규어

에세이 <불>, 레이몬드 카버

1960년대 중반, 나는 아이오와 시티의 한 복잡한 코인 란드리(coin laundry)에서 다섯 통인가 여섯 통의 빨래를 세탁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부분은 아이들의 옷이었지만, 물론 나와 아내의 옷도 섞여 있었다.

그 토요일 오후 아내는 대학체육클럽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내 책임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우리 아이들은 무슨 생일 파틴가 하는 것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있었다. 그 틈에 나는 빨래를 하러 나온 것이다.

나는 이미 코인 란드리 사용을 둘러싸고 한 심술궂은 노파와 한바탕 입씨름을 벌인 뒤, 그 노파 혹은 그녀와 비슷한 다른 누군가와 함께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가게 안에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건조기를 연신 초조하게 곁눈질했다.

건조기 가운데 하나가 작동을 멈추면 나는 젖은 빨래감이 잔뜩 담긴 쇼핑용 바구니를 들고 잽싸게 그 쪽으로 뛰어갈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미 30분 이상 빨래통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며 세탁실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두 번이나 기회를 무산시킨 전례도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우리 아이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딘가에 가 있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녁 무렵이 다가올수록 점점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령 옷들을 건조기에 집어넣는다 해도 빨래들을 다 말려서 기혼 학생 기숙사 안에 있는 집까지 가지고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건조기 하나가 멈춰 섰다. 마침 나는 바로 그 앞에 서 있었다.
건조기 안에 들어 있던 옷들이 서서히 회전수를 줄이더니 잠잠해졌다. 나는 30초 안에 그 빨래의 주인이 나서지 않으면, 그것들을 꺼내놓고 내 빨래를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코인 란드리의 불문율이었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한 여자가 다가오더니 건조기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 코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기계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빨래 몇 개를 꺼내 보았다. 그리고는 그것들이 아직 충분히 마르지 않았다고 판단한 듯, 도로 뚜껑을 닫더니 동전 두 개를 기계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하는 수 없이 다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그 엄청난 좌절감의 와중에서, 이 지구상 그 어디에도 내가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로 내게 다가올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기억이 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내가 언제까지나 그 아이들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언제까지나 영원히 면제받지 못할 책임과 항구적인 걱정거리에 붙박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지금 진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달과 밀물 썰물의 관계, 그것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날카로운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있어 내가 희망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코인 란드리에서, 나는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 인생이 대부분 잔돈 나부랭이 같은 것, 그리 많은 빛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혼란의 도가니와도 같은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내가 존경해 마지않은 작가들의 삶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작가들은 토요일 오후를 코인 란드리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자식 뒷바라지에 바쳐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세상에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거나 시력을 상실하는, 때로는 고문이나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는 등 훨씬 더 심각하게 작업을 방해하는 요인에 직면했던 작가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내 마음이 위로받을 수는 없었다.

그 순간ㅡ 이 모든 일이 세탁 편의점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다ㅡ 나는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서 어떤 종류의 책임과 당혹감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약간의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정말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것을 참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적응 혹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는 시각을 낮춰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야 나에게 통찰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언가? 통찰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한다면 올바른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해왔다.

열심히 노력하고 하나하나 인생을 쌓아가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다.  힘든 노동, 목적, 선한 의도, 충성, 우리는 이런 것들이 언젠가 반드시 보상받을 덕목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런 꿈을 꾸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힘든 노동과 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오와 시티 어디에선가, 혹은 그 직후인 새크라멘토 어디에선가 우리 꿈들은 파열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내가 신성한 것이라고, 경배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모든 정신적 가치들이 바스라지는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에게 무언가 대단히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가족들 사이에서는 한 번도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무언가였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침식(侵蝕)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가 보고 있지 않는 동안에 아이들이 운전석에 앉아버렸다.
지금에야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고삐와 함께 채찍까지 한 손에 움켜쥐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에세이 <불> 中에서





------------------

단편도 훌륭하지만, 나는 이 소박하고 예리한 작가의 에세이가 참 마음에 든다. '마침표 하나까지 제자리에 정직하게' 쓰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평범한 문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글은 이렇게 써야하는 것이다.

두 줄이 안 넘어가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는 그야말로 담백하고 강요없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해낸다. 또한 카버의 소설은,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에서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두근-하고 가슴에 와닿는 위대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그는 최고의 작가다.

[시]저물녘에 중얼거리다 ㅡ 이문재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 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

세상에는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 마음이 더 많아서
기쁨보다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의 닫힌 마음에 다쳐 피 흘리는 마음
비대한 자존심에 깔려 옴짝달싹 못하는 가련한 마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황망하게 떠도는 마음

전해지지 못한 마음은 호러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공포다.

[시]우물 ㅡ안도현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는 절대 아니다.

잘 산다하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이는 일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있어도 어느틈엔가 새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도 잴 수 없기 때문이다.


***

어째서 바람직한 글, 바람직한 정서에는 종종 거부감이 생겨버리는지
다른 사람들처럼 왜 안도현 시가 좋아지지 않는지.
잘 변명할 수 없지만 한 마디하고 도망가자면
모자라고 게으르고 이기적인 내가 줄곧 들어왔던
옳은말(이른바 잔소리;;)들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안다. 또한 유려하고 매끄러운 언어로 쓰여진 싯구가 아니어도, 시인의 위대한 정신만으로 감동을 느낄 수 있음도 안다. 안다. 알기만 한다. 좋아지진 않는다.

[시]파도타기 ㅡ정호승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눈 맞으며 파도위를 걸어서간다
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
가라앉을수록 눈사람으로 솟아오르며
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이
또 이세상 어디론가 끌려가는 겨울밤에
굳어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
먼 산길 짚신 가듯 바다에 누워
넘쳐버릴 파도에 푸성귀로 누워
서러울수록 봄 눈을 기다리며 간다
다정큼나무숲 사이로 보이던 바다 밖으로
지난 가을 산국화도 뭄을 던지고
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저물었나니
단 한번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
살아갈수록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
괴로울수록 홀로 놈칠 파도를 탄다
어머니 손톱같은 봄눈오는 바다 위로
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生


****

산문이 새로운 것을 알게하는 것이라면
시란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는 것.
시집을 선물받던 93년에 정호승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그마만치 삶을 몰랐기 때문에.

10년만에 다시 읽으니 알겠다. 알겠다 느껴진다.
시린 파도에 길 내어 슬픔을 안고 가는 우리들의 생

[시]견딜 수 없네 ㅡ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모든 흘러간 것은 슬프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거나 돌이킬 수 없거나 나날이 멀어져가기 때문이다.

다행히,, 견딜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견디지 못하면 죽을 밖에.

[시] 더 쨍한 사랑 노래 ㅡ 황동규

더 쨍한 사랑 노래 ㅡ 황동규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地表)에서 휘발하고
저녁 하늘
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
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
황당하게 나는 흐른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 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흘러온 곳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할 곳.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혹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쪽?





-- 존재가 휩쓸릴 만큼 사랑했던 사람, 삶의 지표였던 그 사람을 놓쳐버리고나면,
내가 있는 여기가 어디며 세상천지 내가 있을 곳은 어딘지 몰라
헤어진 지점에서 한참 서성이게 된다.
"사랑했던 그(녀)와 함께 왔던 길 반대편으로 가야겠으나..
여기가 어딘지조차 모르겠으니 황망할 뿐이다."

하~ 시가 있어서 힘들어도, 아파도, 상처입어도, 슬퍼도.. 다행이다.

아르누보 시대 리뷰 -알퐁스 뮈샤

알퐁스 뮈샤 Alphonse Mucha(1860~1939)는 아르누보시대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화가다. 그는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였으며, 건축, 보석 디자인과 인테리어 장식, 조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포스터, 장식판넬, 달력, 행사용 인쇄물, 잡지표지, 삽화들은 1900년도 전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르누보(Art- Nouveau)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세기전, 세기의 전환기에 서구에서 유행했던 예술양식으로, 순수예술뿐만 아니라 각종 실용적인 디자인과 상업적인 분야까지도 포괄했던 화려한 장식적 양식이다.

미샤의 모국인 체코의 디자인과 파리의 스타일, 비잔틴과 켈트의 전통 장식, 그리고 그 당시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일본의 회화 우키요에(에도시대에 성행한 유녀(游女)나 연극을 다룬 풍속화) 화풍 모두의 영향을 받은 이 아름다운 '뮈샤 스타일'은, 그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회화 모티브로서, 한때는 아르누보 스타일 전체와 동일시 되기도 했다.

* 알퐁스 뮈샤는 프랑스식 발음으로, 국내에서는 알폰스 무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포스터 Poster


Salon des Cents (1896)



The Slav Epic Poster (1928)






연작 Series

TheFourSeasons(1896)-Spring

TheFourSeasons(1896)-Summer

TheFourSeasons(1896)-Autumn






광고 Advertisements

Job I (1896)

Job II (1896)  



Lefevre-Utile Biscuits(1896)-Madere

Moet et Chandon(1897)-Menu1






장식화 Decoratives

Zodiac (1896)






그외 회화작품 OtherPainting

Unknown (1901)

The Kiss (1918)






기타 OtherWorks

Sycamore Brooch (1905)

Fuchsia Necklace (1905)

TheWind PasseswithYouth(1899)


[시]도끼를 위한 달 - 나희덕

이제야 7월의 중반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에는 11월이 닥치고 있다
삶의 기복이 늘 달력의 날짜에 맞춰 오는건 아니라고
이 폭염 속에 도사린 추위가 말하고 있다
11월은 도끼를 위한 달이라고 했던 한 자연보전론자의 말처럼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어떤 나무를 베어야 할 지 알게 되고
도끼날을 갈 때 날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면서
나무를 베어도 될 만큼 추운 때가 11월이라 한다
호미를 손에 쥔 열달의 시간보다
도끼를 손에 쥔 짧은 순간의 선택이,
적절한 추위가,
붓이 아닌 도끼로 쒸어진 생활이 필요할 때라 한다
무엇을 베어낸 것인가, 하루에 몇 번씩
내 안의 잡목숲을 들여다본다
부실한 잡목과도 같은 생(生)에 도끼의 달이 가까웠으니
7월의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11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도끼 자루를 다잡아보는 여름날들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편지

스웨덴의 보레비 고르 프레디에서,  1904년 8월 12일

(…중략…)
이미 지나가기는 했지만 당신은 여러 가지의 크나큰 슬픔들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나쳐간 것까지도 고통스럽고 비위에 거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크나큰 슬픔들이 오히려 당신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지나 않았나 한번 생각해보시겠습니까? 당신이 슬퍼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의 내부에서는 많은 것이 변했거나, 당신의 본질의 어느 곳이든 스스로가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더욱 큰소리를 내도록 여러 사람과 나누어 가지려는 슬픔만이 위험스럽고 나쁠 뿐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치료만 받은 질병과 같아서 다시 나타날뿐더러, 짧은 잠복기가 지나면 더욱 무시무시하게 폭발하거나 내부로 응고되어 생명 있는 것이 되며, 으깨어지고 타락한 삶이 되어버려서 도저히 거기서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지식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여 먼 곳을 바라다보고 우리들의 예감 이상으로 조금 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슬픔을 보다 깊은 신뢰감을 갖고 견딜 수가 있을 것입니다.

슬픔이란 무언가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들어서는 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은 뒤로 물러서고 거기에 고요가 생겨나며,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것이 그 가운데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온갖 슬픔은 긴장의 순간인데, 우리들은 그것을 오히려 마비로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낯선 감정의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 집에 들어선 낮선 손님과 단둘이서만 있게 되기 때문이며, 순간적으로 모든 친근한 것들과 낯익은 것들을 빼앗기기 때문이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과도기에 우리들이 서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역시 지나갑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새로운 것이나 첨가된 것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와서 깊숙한 내심방(內心房) 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혈액 속으로 들어가 섞여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게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기가 쉽지만, 그리도 우리들은 손님을 맞이한 집처럼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들은 그게 누구였는지, 그게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징조가 있어서, 미래는 그것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우리 내부에서 변화하기 위해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 속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플 때는 고독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에게로 들어오는 그 굳어버린 듯한 순간이 비록 겉으론 전연 사건이 없어 보이지만, 미래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생겨날 때의 시끄럽고 우연한 순간들보다는 훨씬 더 생명 가까이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느끼는 자로서 조용하고 참을성이 있을수록 새로운 것은 보다 깊숙이 곧바른 길을 찾아 우리 내부로 들어오며, 우리들은 그것을 훨씬 쉽게 얻을 수 있고 그것을 우리들에게 더욱 가까운 운명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설사 훨씬 뒷날에 우리들에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것의 내부에서 변화되고 그것에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건 정말이지 필요합니다. 필요할 뿐 아니라 점차 우리들의 발전이 그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딪치게 되는 것으로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래 전부터 이미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운동 개념이 이미 잘못 생각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인으로부터 나와서 외부로부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들은 서서히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운명이 그들 내부에서 살고 있는 동안 그걸 흡수해서 자신 속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운명은 자기들에게 너무나 생소해서 그들은 당황하고 놀란 나머지, 그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들 내부로 들어갔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한 번도 그와 비슷한 것조차 본 적이 없노라고 맹세합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태양의 운동을 착각했던 것처럼 다가오는 자의 움직임에 대해 속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애하는 카프스 씨, 미래는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우리들만이 끝없는 천공(天空)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걸 어렵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금 고독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결론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선택하거나 방치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들은 고독합니다. 단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거나 행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일이 그런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고독하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물론 혼란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친근하고 낯익은 것들을 모두 빼앗겨서 가까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먼 것은 모든 게 무한히 멀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자기 방으로부터 느닷없이 산정(山頂)으로 끌려 올라간 사람이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비할데 없는 불안감이나 이름도 없는 것에 몸을 맡겼다는 감정이 그 사람을 파멸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는 추락할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허공에 내던져졌다고 믿거나 수천 개의 조각으로 산산히 찢겨졌다고 믿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의식상태를 회복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뇌수는 엄청난 거짓말을 찾아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이리하여 고독해지는 사람에게는 모든 거리와 척도가 달라집니다.

이런 변화로 그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느닷없이 일어나며, 산정에 오른 사나이의 경우처럼 인내의 한계를 넘은 이상스런 공상과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경험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존재를 그것이 미치는 범위 이상으로 넓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 즉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 역시 그 속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들과 만나게 되는 가장 이상한 것, 가장 놀라운 것, 아무리 해도 불가사의한 것에 대해서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단 한번의 용기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의미에서 비겁하다는 사실은 삶에 대해 무한한 해독을 끼쳤습니다.

환상이라고 불리는 체험, 이른바 '영혼의 세계', 죽음 따위와 같이 우리에게 너무도 친근한 것들이 날마다 우리 생활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잘만 하면 파악할 수도 있는 의미들이 오히려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물며 신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불안은 우리 개개인의 존재를 빈약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그것으로 인하여 제한을 받게 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하상(河床)으로부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불모의 강안(江岸)으로 끌어올려진 셈입니다. 인간관계를 그토록 말할 수 없이 단조롭고 구태의연하게 사건과 사건의 맥빠진 반복으로 만든 것은 우리들의 게으름 탓만은 아닙니다. 견딜 수 없다고 믿는 새롭고도 보이지 않는 체험을 무조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수께끼 같은 것도 포용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도 무언가 살아 있는 것으로 체험할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만끽할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개개인의 존재를 크든 적든 하나의 영역으로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영역의 한쪽 구속이나 창가나 그들이 오르내리는 좁은 길만을 겨우 알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겨우 어떤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애드거 앨런 포의 얘기에 나오는 죄수들이, 그들의 무시무산 감옥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그들의 처지를 친근하게 해보려고 애쓰는 그런 위험스런 확신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죄수도 아니며 우리 주위에는 함정이나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겁을 주거나 괴로움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어서 대게는 거기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수천 년에 걸친 적응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 삶과 너무나 닮아버려 조용히 버티기만 하면, 우리가 쓰고 있는 다행스런 보호색(保護色) 때문에 우리들을 애워싼 다른 것들과 구별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불신감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가 공포를 가졌다면 그건 바로 우리들의 공포이고 심연(深淵)을 가졌다면 그건 우리들의 심연이며,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것을 사랑해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언제나 어려운 쪽에 붙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을 이룩해간다면, 지금까지는 낯선 것으로 보이던 것도 우리들의 신뢰자나 귀중한 재보(財寶)가 될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친애하는 카프스 씨, 설사 당신이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정도로 크나큰 슬픔이 당신 앞에 버티고 있을지라도 놀라서는 안 됩니다. 불안이 불빛과 어두운 구름처럼 당신의 손과 당신이 행하시는 모든 것 위로 스쳐지나가도 의연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으며, 삶은 당신을 잊지 않았을 뿐더러 당신을 손아귀에 꽉 잡고 있어서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불안이나 우수나 슬픔 따위를 당신으로부터 추방하려고 하십니까? 그런 상태가 당신에게 오히려 어떤 일을 해줄는지도 알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로 왜 그리 괴로워하십니까? 당신은 과도기에 처해 있으며 스스로 변화되기를 무엇보다도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길에 무언가 병적인 것이 있거든, 병이란 것은, 유기체가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유기체를 도와서 제대로 병이 되도록 해야 하며, 그 병이 곪아 밖으로 터져나오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게 바로 유기체를 위한 하나의 발전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카프스 씨, 당신 내부에서는 지금 숱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병자처럼 참으시고, 회복기에 있는 환자처럼 확신을 갖도록 하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병자이지만 그 병이 나아가는 회복기의 환자일는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당신은 감시를 해야 할 의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병이든 간에 의사도 기다려야만 하는 나날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의사로서의 당신이 지금 무엇보다 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관찰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벌어지는 일로부터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현재 당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에 관여되어 있는 당신의 과거를 질책의 눈으로 보기가 쉽습니다.

그런 일이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당신의 어린 시절의 갈등과 동경이나 소원에서 생긴 일로서 현재 당신의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회상하거나 판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고독하고 무력한 어린 시절의 일상적이 아닌 관계들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며 여러 가지 영향에 몸으 내맡기고 있을뿐더러 실생활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덕이 그 속으로 끼어들었더라도 그것에 악덕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됩니다.

도대체 이름이란 것에 대해서는 조심을 해야 합니다. 한 생명을 파멸시키는 것도 범죄라는 이름일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아마도 이 생명의 어떤 필연성일수도 있고 그 생명으로부터 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힘의 낭비가 당신에게는 중대하게 보이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승리라는 것을 지나치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의 감정으론 정당하겠지만, 승리란 당신이 이룩했다고 믿는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것은 이미 거기에 존재했던 것이며 속임수 대신에 무언가 절실한 것, 즉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당신의 승리는 단순한 도덕적인 반응에 불과할 것이며 벌다른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벌써 당신의 생활의 단편이 되었습니다. 친해하는 카프스 씨, 제가 그렇게도 소원을 품고 생각하고 있는 당신의 생활의 한 단면이란 말입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삶의 위대함을 얼마나 동경했었나 회상해보십시오.

이제 그것이 큰 것에서부터 더욱 큰 것을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은 언제나 어려우며 그러면서도 그것은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이제 또 한 마디 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이 사람이 당신에게 때로는 즐거움을 주는 이런 단순하고 조용한 말들 속에서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편하게 살고 있다고는 믿지 마십시오.

이 사람의 삶도 고난과 슬픔을 갖고 있으며 오히려 당신에게 훨씬 뒤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은 그런 말들을 찾아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中에서,  R.릴케 지음, 범우사




ㅡ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문학과 자신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던 어느 젊은 시인에게 릴케가 보낸 편지를 모아 만든 책이라는 설명과 함께 "릴케의 문학세계에 접근하려는 사람이나 장차 문학을 지망하려는 사람, 그리고 마음 속으로 시를 쓰는 고독한 젊은이들에게 릴케만이 갖는 영혼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글들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써져있다.
헉, 나는 후자에 해당하지 않는가. ^^

이렇게 장문을 다 올릴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몇 줄만이라고 시작했는데 그 유려한 문장 하나라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생노가다 짓을 한시간이 넘게...( 왭 상에 누가 쳐놓은게 없을까하는 얄팍한 기대를 갖고 검색엔진을 뒤졌으나 성과가 없었다 -_ㅠ)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 마리너 라이아 헉!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그리워하며.

(그저 난, 워드치는 내내 "이 글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빨간머리앤 피규어

빨간머리앤은 캐나다의 아동문학가 몽고메리의 1908년 작품이다. 동화로 유명한 이 작품은 일본의 아니메 역사에서 살아있는 전설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이 제작기획에 참여했다.
당시 도에이 동화에서 주로 동화 애니메이션 제작기획을 하던 미야자키 감독은 영상으로 이적후 1974년 명작시리즈 첫번째 작품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발표.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1975년 빨간머리 앤을 발표한다.
1975년이면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다. (항상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제작년도를 보고 놀란다는) 예로 이웃집 토토로의 제작년도가 1988년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근 일본에서는 복고풍 애니 바람이 일면서 과거 추억의 명작 애니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우리나라 역시 그러한데, 요근래에 새로 생긴 빨간머리앤 홈페이지만 해두 10개가 넘는다.
이러한 흐름을 타듯 일본에서는 빨간머리 앤 가샤폰을 제작했다. 그것도 완구 회사로 유명한 반다이가 아닌 K&M사에서.
2002년 1월 발표된 앤 피규어는 현재까지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역동적인 모습과 표정


귀여워...


세상에. 그 창가 잖아


매튜,마릴라네 집에 처음 오던.


아. 다이애나도. 역시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