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글 세상 메모'에 해당되는 글 16

  1. 2009.09.22 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2. 2009.07.09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이임사 전문
  3. 2009.05.30 노무현 전 대통령 명연설 -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4. 2009.05.26 그사람, 노무현
  5. 2009.04.23 400년 된 고양이 미라
  6. 2009.04.23 "이 꿈과 소망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7. 2007.08.23 美 유명평론가의 영화 <디워> 비평글
  8. 2006.08.17 차범근이 아들 차두리에게 쓴 글
  9. 2006.08.02 논리형 말짱 DJ, 감성형 말짱 YS
  10. 2006.07.25 다시 박노자

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표지이야기-노동 OTL]
종일 12시간 서서 일하면 떼어내고 싶어지는 몸과 머리…
감시 속에 말조차 잃은 단절의 작업장에서 보낸 한달



'4천원짜리 인간'들이 있다. 2009년 최저 임금인 시급 4천원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언론은 가난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종종 전해왔지만,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틈은 무장 벌어지기만 한다. '워킹푸어'(working poor)는 2년전 이미 3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왔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동트기 전에 출근해 별을 보며 퇴근해도 가난은 결코 저물지 않는 이들이다.

< 한겨레21 > 은 그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를 구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부닥치고 일했다. 그 돈으로 한 달 생활을 직접 꾸려보았다. 첫 번째 일터는 경기 안산 지역 공단의 중소기업 생산직이었다. 지난 7월 하순부터 구직 활동을 시작해 8월6일부터 9월5일까지 일했다.

시급 4천원의 노동자가 생존을 넘어 생활로, 생활을 넘어 행복으로 다가가는 게 가능할지 가늠해본 한 달간의 기록을 세차례에 걸쳐 전한다. 10월에는 일터를 옮겨 또 다른 '슬픈 노동'의 현장을 전하는 2부가 이어진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① 작업 라인의 노예
② 4천원의 삶과 행복
③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한철,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값싼 '을'이었다.
1970~80년대 공장 노동이 '여공'과 '미싱'으로 상징된다면, 지금은 전동 드라이버다. 계절 따라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공장 시계 돌아가는 소리는 아니 들리고, 일주일에 7일, 하루 12시간씩 나사 돌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곡절 끝에 취업한 A사, 대부분의 여공 손에도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다.

날 알선해준 '갑'(ㄷ용역회사)의 ㅇ과장은 "한 달에 140만원 플러스 알파, 그래서 170만원까지 받아간다"고 설명하며 액수를 메모까지 해줬다. 지난 8월11일 아침 7시30분께 서명한 계약서 뒷면에 그가 볼펜으로 끼적인 '희망'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 희망이 얼마나 고되며, 또한 야망에 가까운지 깨닫기까진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8시30분 종소리와 함께 라인에 서다

난 계약서를 쓰자마자 A사로 '배달'됐다. 함께 '을'이 되어 공장에 온 무리는 다른 인력회사에서 온 이들을 포함해 19명이었다. 이들은 통상 '용역'으로 불린다. 인력회사 관리들이 줄을 세웠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자 A사 생산부장이 와 사열해 있는 우리를 뭉텅뭉텅 갈랐다. A사는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석유난로·냉장고·비데 등 여러 가전제품을 컨베이어벨트 따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탄탄한 중소기업이다. 나는 다른 6명과 함께 '라인 55R'에 배치됐다. 이 회사의 주력사업인 중소형 석유난로 제작 라인이다.

'아, 마음의 준비가 덜됐는데….' 아찔해하고 있을 찰나 종이 울렸다. 정확히 아침 8시30분, 탱크 바퀴처럼 육중한 라인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겐) 기습적으로 시작된 첫 공장 근무는, 급류에 떠밀리듯 허우적대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오전 10시가 되자 허기로 멍해졌고, 11시가 되자 다리를, 오후로 들어서자 머리를 떼어내고 싶었다. 한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작업하는 상체를 받치는 다리가 꺾일 것 같았다. 사타구니 높이의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난로를 내려다봐야 하는 머리는 불필요하게 무거웠다. 오직 한마디만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단전돼라, 단전돼라, 신이시여 단전되게 하옵소서.'

텅 비우지 않으면, 머리를 기어코 컨베이어벨트 위로 내동댕이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즈음, 30대 후반의 반장은 "오늘 잔업은 9시"라고 알렸다. 오후 4시 남짓이었다. 이후 5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

휴대전화를 꺼내 처음으로 시간을 봤던(작업 중 휴대전화를 꺼내는 이는 거의 정규직이라고 보면 된다) 8월19일의 기억이 선명하다. 오후 6시 야간 잔업이 시작되고 밤 9시가 멀었나 싶어 시계를 보면 7시10분이었고, 9시가 됐나 싶어 시계를 보면 8시였으며, 9시가 됐겠지 싶어 시계를 보니 8시40분이었다. 9시 라인이 멈추자마자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은 없다.'

난로 제작 라인에서 내게 맡겨진 일은 간단하다. 아니 30~40명 작업자 모두의 일이 간단하다. 드라이버로 나사 두 개만 박는 이도 있었다. 내 작업표준서를 보면, '9번 공정'으로 '동편심 검사'라고 적혀 있다. 옆 공정에서 석유난로의 공기통에 심지를 끼워 전달하면, 나는 공기통 높이가 일정한지(동심), 공기통이 쏠리진 않았는지(편심), 심지의 높이는 일정한지(심지)를 육안, 링, 디지털 게이지 등을 이용해 검사한다.

보람도 사회적 자존감도 없는 노동

그래서 심지 높이가 7~9mm 범위를 벗어나면 펜치로 심지를 집어올리거나 쇠주걱으로 눌러내린다. 편심 허용 범위(3.95~4.75mm)를 벗어나면 쇠주걱으로 좁은 곳을 벌려준다. 그러면서 이제 갓 '엔진'을 단 난로 하나당 두세 번씩 손잡이를 돌려 심지가 올라오는 것을 살핀다. 그리고 공기통 캡을 '꼬챙이'라는 도구로 공기통에 고정한다. 대략 1분 안팎에 서둘러 해야 할 일들이다.

무엇보다 초반엔 서서 일하는 고통을 버티기 힘들었다. 노동 세계엔 서서 일하는 저주받은 자와 앉아 일하는 복된 자, 두 부류만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2주 정도 지나자 좀 익숙해진다. 이후에 경기 수원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노동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앉아서 일해도 집에 가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하소연했다. 첫쨋주에 발바닥·목·어깨가 쑤셨고, 3주차로 접어들자 허리도 아팠다. 일곱 군데에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과 손마디는 지금도 통증을 느낀다.

물론 '라인'은 '인간'을 개의치 않는다. 붕어빵 찍어주듯 물량이 내게 건네진다. 오전 8시30분~10시30분 A타임에도, 10시40분~12시30분 B타임에도, 점심 먹고 오후 1시30분~3시30분 C타임에도, 3시40분~5시30분 D타임에도, 그리고 30분 저녁 식사 뒤 6시부터 저녁 8시나 9시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야간 잔업 때도 기계처럼 서서 목장갑이 닳도록 손잡이를 돌리고, 펜치를 쥐며 쇠주걱을 들이댄다.

안산에서 만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일의 보람이나 사회적 자존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다시금 '공순이' '공돌이'란 사회적 비하가 유행한대도, 이들은 침묵으로 '내면화'할 것이다. 별이 뜬 퇴근길은 그저 피곤하다.

일해도 가난한 노동자에게 희망은 오직 돈이다. 나부터도 날품으로 팔려가는 계약서에 서명할 때 '170만원'만 눈에 들어왔다. 올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인 132만7천원을 훨씬 웃돌지 않나.

1. 시급 4천원, 상여금 230%, 임금 지급일 매월 11일
2. 근로시간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휴게 시간 12시30분~1시30분)
3.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을과 합의하여 1주일에 12시간을 한도로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4.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을의 의견을 들어 근무 장소 또는 업무를 변경할 수 있다.

5. 정규작업 시간 이외에 야간근로 및 휴일근로를 실시하는 것에 동의한다.
6. 최초 1개월 미만 근무시 작업복 대금 1만5천원을 공제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갑'이 내게 준 계약서 조건대로는 한 달 170만원을 웬만해선 벌 수 없다. 나와 한날 한 라인에 배정된 7명 가운데 5명이 2주가 채 안 돼 그만뒀다. '가난한 희망'마저 별처럼 멀어진다.

공단 담벼락 너머 연기 뿜는 여느 공장 안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첫날 풍경은 둘로 집약됐다. '공장 노동자'는 쉴 새 없이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반자동화 기계로 서 있다. 그들 머리 위 공장의 시계는 '국방부 시계'보다 천천히 간다. 그렇게 난로는 유유히 하루 1500개가량씩 완성돼간다.

이것이 어렵다, 어렵다 곡소리를 내는 중소기업들도 조금씩 살을 찌우는 비결일 것이다. 다시 짚어볼 문제지만, 모든 중소기업이 보호받을 만하거나 위약한 건 아니고, 모든 반장이 간악한 것도 아니다.

1. 단순 공정의 진실

단순 조립 노동. 안산에만 8만6천 명가량(2008년 안산시청 통계)이 일한다. 투자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자리다. 모두에게 그렇진 않겠으나, 그래서 가장 값싼 '막장 노동'이 된다. 하지만 '단순하다'가 '손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은 기술이 아닌 요령으로 일한다. 요령의 부족분은 무조건 힘으로 때워야 한다. 극도의 단순 공정은 몇몇 신체 부위만 집중적으로 노쇠시킨다. 하룻새 양손에 물집이 잡혔다. 가만히 한곳에 서서 순간적으로 허리힘까지 써가며 편심을 맞추고, 악력을 키워 심지를 올리며, 손바닥과 어깨힘으로 심지를 누르느라 고통을 느끼는 일조차 분주했다.

"멍 때려야 시간이 간다"

특히 내 바로 옆 10번 공정은 '파견 노동자의 무덤'이었다. 난로의 내부 덮개를 씌우는 단순한 일이다. 홀더를 양옆에 끼워 볼트 4개만 조이면 된다. 이렇게 단순한 일인데, 2~3일 간격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대개 드라이버는 줄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이 공정은 특성상 직접 손으로 쥐어야 한다. 무게가 있다. "팔이 마비되려고 해" "손이 펴지지 않는다"는 작은 절규가 사람마다 이어졌다. 파견 노동자는 쉽게 그만두거나 느리니까, 다른 라인의 정규직 노동자를 데려다 앉힌다. 그 또한 이튿날 파스를 붙이고 왔다.

'단순하다'는 '지겹다'와 통한다. 손에 익지 않을 경우 고통은 천천히 오밀조밀 전해지고, 손에 익으면 고통보다 더 큰 피곤함으로 잠이 쏟아진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 공포만큼 이들에게 버거운 것도 없다. 지방대를 다니다 8월 초부터 일해온 24살 정원식(가명)씨는 "A타임에는 김태희를, B타임에는 전지현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부터가 온통 음흉, 불량한 생각들에 사로잡혔다. 경기 부천에서 공고를 나온 염철수(28·가명)씨는 "멍 때려야 시간이 간다"며 "그땐 완전 (자신이) 기계예요, 기계"라며 한숨을 쉰다. 실제 라인 속도는 목표량에 맞춰 반장이 자유롭게 조정한다. '멍 때린' 채 라인의 노예가 된다. '의식'이 비집고 설 틈이 없다.

공장에 근무한 4주 동안, 생산직 노동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딱 한 번 전날 뉴스가 회자됐는데, 탤런트 이영애씨 결혼 소식이었다. 한 남성 동료가 "더 이상 돈 벌 이유를 잃었다"며 경악했다. 동경하던 연예인의 결혼에 허탈한 심정이야 그렇다치고, 그들은 알까? 이영애씨가 드라마 < 대장금 > 에서 받은 회당 출연료는 600만원 정도라는 사실. 5시간 동안 촬영한다면, 시급 120만원꼴이란 사실. 2003년 얘기다.

의지와는 상관없다. 오전 10시가 넘으면 허기가 져 텅 비고, 오후로 접어들면 지쳐 텅 빈다. 팔과 몸둥이만 라인 따라 움직이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본다. 내 공정을 자동화 설비로 바꾸려면 꽤 많은 돈이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1시간에 4천원을 받고, 평균 250~300개의 난로를 검사한다. 아주 저렴한 기계설비인 셈이다.

하루도 못 버티고 떠나는 사람들

그러니 떠난다. 텅 빈 노동, 빈곤한 노동에 기겁한다.
공고를 갓 졸업한 20살 하민우(가명)씨. 8월13일에 들어와 19일 그만뒀다. 그는 "공장이 제 일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34살 안산 출신 김정민(가명)씨. PC방과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빚을 졌다. 수개월 실직 상태로 지내다, 결국 공장문을 두드렸다. 여성과 동거 중이다. 10번 공정을 맡았다. 8월12일 출근해 사흘 일한 뒤 더는 볼 수 없었다.

옌볜 출신 중국동포인 42살 남성. 가족과 함께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올해 국적을 취득했다. 아내는 화장품 상자 공장에서 일한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의 방값을 낸다. 웃는 얼굴이 자애로운데, 여러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8월24일부터 닷새 동안 일한 뒤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사흘은 10번 공정을 맡았다. A타임이 끝나며 그는 "팔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는데, 점심시간을 앞두고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를 꺼내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았다.

20대 초반의 연인 관계로 보이는 남녀가 8월11일 나와 함께 한 라인에 배정됐다. 그 주 금요일까지 나흘을 채운 뒤 그만뒀다.

8월18일, 30대로 보이는 남성. A타임 2시간만 일하고서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도 10번 공정이었다. 반장이 작업 속도가 더디다고 채근을 좀 했다.

21살 남성. 동거 중인 여자친구(23)가 몇 달 아픈 바람에 전에 하던 공장일을 쉬었다. 9월3일 이곳으로 왔다. 그를 본 건 그날 하루뿐이다. 공기통에 심지를 끼우는 초반 공정을 도왔다.

내 위치에서 볼 수 있는 파견 노동자들의 '입출'이 대략 이러했다. 난로 라인은 작업표준서상 모두 28개 공정으로, 보통 35~40명 남짓이 울력한다. 후반 공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예고 없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다. 대략 하루 6~7명이 라인에 새로 오면 그중 2~3명이 다음날 '증발'한다.

2. 착취의 속살

그런데도 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기업은 수익을 낸다. 납득이 어려웠다. 인력회사 관리들의 말을 종합하면, A사의 생산 정규직은 140명 정도인데, 파견 노동자는 한창 많던 8월 중순 340~400명에 이른다. 기업공시를 보면 정규직은 사무직을 포함해 240여 명이다.

최저임금에 일도 고돼, 기척 없이 그만두는 이의 수를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8월 마지막주로 접어들면서 파견 노동자 자체가 급감했다. 전체 260명 정도만 조달된다는 것이다. 8월27일 라인 반장은 "50여 명 정도가 인력회사에 등록하고선, 겨우 20명 정도만 온다"고 말했다. 대학생 '알바'가 대거 빠지고, 추석을 앞둔 시점에서 단가가 센 할인마트나 택배 쪽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이다.

인력이 빠져도 목표량을 채우는 비결

그런데도 생산량은 또 큰 차이가 없다. 일일 1200~1500개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했다. 라인 가동 속도가 줄긴 하지만, 남은 자들이 다른 공정까지 바삐 수행하며 목표량에 근접시킨다. 라인이 느려도 맡은 공정이 많으면, 라인이 빠른 것과 다름이 없다. 당연히 업무 강도가 높아진다. 나 또한 8월 말 인력이 부족하자 검사 공정을 끝내고 드라이버로 나사까지 박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소했다. 반장을 포함한 정규직도 피해를 본다. 라인을 돌며 관리·지시하던 반장도 꼼짝없이 공정 하나를 도맡는다. 그는 점심을 거르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반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 파견 노동자들의 잔업 통제다. 우리 라인 반장도 잔업 거부자가 많은 날엔 '육두문자'를 쓰며 방방 뛴다. 조례 때마다 "우리 라인 근태표가 가장 지저분하다"거나 "제발 잔업을 빠질 거면 3시30분 이전에 알려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미움을 덜 산다. 잔업 못한다고 하면 즉시 관두라고 하는 라인 반장도 있다. 잔업을 빠지려면 별의별 수모와 눈치를 감수해야 한다.

당연히 파견 노동자에게 소속감이란 찾아볼 수 없다. 관두라면 관둔다는 식이다. 2시간만 일하고, 또는 오전만 일하고 가버린다. 4천원짜리 노동은 차고 넘친다. 상징적으로 이 공장 화장실을 보면, 변두리 공원 화장실처럼 더럽다. 담배꽁초가 수북하고, 휴지가 가득 널려 있다. 누구도 깨끗이 써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품질이 일정할진 알 수 없다. 다만 8월31일 밤 9시 잔업 뒤 종례를 기억한다. 반장은 "난로 3100개 가운데 3천 개가 불량으로 나왔어요. 스크루 박다 기스 나고, 라벨 비뚤어지게 붙이고…. 그거 나올 때까지 생산부장이 뭘 했냐고 그러는데, 나도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시말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는 인력이 빌 때마다 누구보다 바빴고 성실해졌다. 결국 9월 첫쨋주 야간 작업은 불량 제품의 재작업으로 대신했다. 경영진은 손해를 보았을까, 이득을 보았을까.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단가 후려치기 등 원-하청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합리를 탓한다. 그러면서 강요되는 손해분을 안으로 노동자에게 전가한다.

1분만 지각해도 30분치 시급 공제

대기업의 냉장고를 하청 생산하는 A사 역시 생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적 근태 관리들이 있다. 가령 업무 시작은 아침 8시30분이지만, 반장 조례를 8시15분에 한다. 조례가 끝나면 대체로 자기 위치에 가 부품을 정렬하거나 드라이버에 기름을 넣는다. 밤 9시 작업 종료 뒤엔 청소와 종례를 한다. 10분 안팎이 소요된다. 공원들은 실상 하루 20~30분의 공짜 노동을 하고, 사용자 처지에선 1명당 2천원씩을 버는 셈이다. 대신 노동자가 1분만 지각을 해도 30분어치의 시급을 제한다. 당근은 최소화하고 채찍은 최대화하는 메커니즘은 언제나 가진 자가 더 가질 수밖에 없는 동력이 된다.

준비운동으로 정확히 근무를 시작하는 공장이 엄연히 있다. 청소까지 근무 시간 내 공정으로 포함해둔 곳도 있다. 물론 더 인색한 기업도 많다. 시급으로 책정되는 2시간 간격의 쉬는 시간을 5분만 배정한 기업이 대표적이다. 그곳에서 일하다 온 한 파견 노동자는 "담배 하나 피울 시간이 안 됐다"며 증오했다.

일당으로 계산해 한국인에겐 5만원, 중국인 3만5천원, 동남아인에겐 3만원만 주는 공장도 있다. 이 공장은 때때로 새벽 3시까지 철야를 시킨 뒤 아침 8시에 출근하게 한다. 철야는 경영진에 이득이다. 값비싼 생산설비를 쉬지 않고 가동할 수 있고, 시급이 워낙 낮으니 수당 부담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자동차 산업이 어려워지자 파견 노동자 먼저 일괄적으로 정리했다. 이곳에서 쫓겨난 뒤 9월 초 A사에 파견 노동자로 들어온 22살 공원의 이야기다.

A사는 각기 다른 노선의 통근버스 3대로 노동자를 태워온다. 하지만 밤 9시 야근자가 많을 경우, 오후 5시30분이나 저녁 8시에 퇴근하려는 이들에겐 한 노선 1대만 운영한다. 상당수가 대중교통비를 써야 한다. 모든 라인이 잔업을 할 경우 오후 5시30분에 퇴근하는 이에겐 그조차도 없다. 결국 1천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공장 퇴근버스를 타려는 사람은 무조건 잔업을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대중교통 노선은 우회하기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난 회사버스를 타도 밤 9시에 끝날 경우 집에 가면 10시가 넘었다.

잔업과 철야가 연일 가능한 것은 '빈곤한 노동자'가 항상 넘치기 때문이다. 이달 A사에서 일한 지 3개월째가 되는 40대 후반의 정성훈(가명)씨는 잔업이 저녁 8시에만 끝나도 화를 냈다. "저녁까지 먹었는데, 9시까진 해야지 돈이 좀 모이는데, 이게 뭐냐"며 '단전'을 외쳤던 내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던진다. 많은 이들이 생활이 아닌 생존, 부유가 아닌 충족을 원한다. 그를 위해 '착취'조차 달게 받는다.

3. 침묵의 노동

근무 첫날 다섯 마디가량 말을 했다. 오전 10시30분 종이 치며 라인이 서자 "쉬는 시간이냐"라고 묻고, 낮 12시30분 종이 치자 옆 공정 중년의 정규직 여성에게 "점심시간이냐"라고 물었던 몇 마디다. 그 여성은 "응" 하면서 쏜살같이 식당으로 달려갔다. 안산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 가운데 하나다.

이후로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근무 중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파견 노동자들은 입이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을 하는 이는 대개 정규직이다. 휴대전화 통화나 문자 확인은 도덕과 상식, 인륜을 망각한 짓이 된다. 반장이나 경력 높은 정규직만 사용한다.

침묵의 노동은 일터의 행복, 연대감, 일을 통한 사회화를 일거에 잘라낸다. 몇 가지 이유가 보였다. 뜨내기 날품이 많은 탓이다. 처음 온 파견 노동자의 이름을 물어봤댔자, 그가 내일도 올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가장 값싼 파견 노동자들은 안면을 익혔거나 친해진 동료가 떠나는 걸 두려워한다. 더 좋은 일자리를 모른 채 자기만 정체돼 있다는 불안과 열패감이 있다. 실제 신입 파견 노동자가 많은 날은 공장 전체의 활력을 발견하게 된다. '동질감' 덕분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20대 여성은 며칠 만에 공장을 그만둘 즈음 이런 말을 했다. "왜 여기 사람들은 웃지도 않고, 말도 안 걸어줘요?" 그건 아마 시급으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생산 관리들의 통제다.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음악도 듣지 못하게 하는 마당이다. 침묵은 그렇게 관례화된 것이어서 파견 노동자는 첫날부터 자연스레 몸에 익힌다. 누구도 말을 잘 걸지 않기에 침묵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오후로 넘어가면 힘들어서 말을 하려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말 걸자 반장 눈치 보며 외면

이미 제 커뮤니티를 잃거나 떠나, 홀로 인력회사를 통해 들어온 뒤, 혼자 일하다 혼자 밥을 먹는 이가 상당수다. 입 없는 이의 입으로 밥이 사라지는 풍경은 슬펐다. 내가 유일하게 받은 복은, 10번 공정에 다른 라인의 7~8년차 여성 정규직이 배치돼 말을 걸어주는 것이었다. 근무 3~4주차로 접어들며 조금이나마 적응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몇 살이야?"
"35살이오."
"아이고 미안해, 반말해서."
"아, 아니에요. 저랑 동갑도 아니시잖아요."
"하하호호하…. 결혼했어?"
"아뇨."
"에구, 엄마 속 타 죽겄네."
"예.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걸 하고 있어요.) 그런데 반장은 돈 많이 받아요?"

"월급? 얼마 못 받아. 시급 좀 높고, 수당 6만~7만원인가 더 받을걸."
"일주일에요?"
"뭔, 한 달에. 그러니까 반장 말 잘 들어."
8월21일 처음 말을 걸어준 40대 정규직 여성(7년차)은 친절하고 활달했다. 하지만 이들조차 반장의 눈치를 본다. 작업 중 내가 얼굴을 보며 대화할라치면 "왜 날 보고 말해?" 하며 자세를 교정시킨다.

생산 정규직 대부분이 여성이므로 근무 중 대화도 대개 여성들의 것이다. 그 사이 넉살 좋은 20대 젊은 청년이 '대화 무리'에 쉽게 끼는 '우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휴식 또는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며 주고받는 몇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다. 시급에 대한 불만, 각 라인 반장에 대한 험담, 그리고 음담패설까지 담배 연기에 뒤섞여 더 자욱하고 질펀해진다.

비흡연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 점심시간 공장을 돌아봤다. 불 꺼진 건물 안에서 혼자 멀뚱히 앉아 있거나 탈의실에 누워 쪽잠을 잔다. 휴식조차 침묵이다.

4. 정규직과 비정규직

초반 파견 노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A사의 두 가지 단점을 들었다. "음식이 맛없다"와 "반장이 까다롭다". 대신 (정규직) 아줌마 텃새는 적다고 했다. 공장 경력이 꽤 되는 여성 파견 노동자들이 가장 반겼다. 하지만 어디든 군기반장 구실을 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라인에서도 근처 공정에서 막히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파견 노동자에게 보란 듯 소리친다. "아이구 속 터져~, 아주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네~" 식이다. 대부분의 40~50대 정규직 여성은 인자한 말년 병장과 매서운 일병의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 오지랖도 넓으시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공정의 작업자한테까지 지적을 한다. 그러면 반장이 출동해 '해결'하는 식이다.

우리 라인 파견 노동자들이 금요일 잔업을 못한다고 해서 반장이 성을 내며 오후 5시28분에 라인을 세웠다. 지난 8월21일이다. 줄 선 작업자들 앞에서 "주간 목표량을 못 맞췄는데, 금요일 밤에 약속을 잡는 게 말이 되냐"며 한참을 질책한 뒤, 다른 라인에 지원 갈 남자 4명만 나오라고 했다. 급할 때 라인별로 인력을 서로 지원한다. 품앗이하는 것이다. 하필 반장 코앞에 내가 섰다. 어이없이 나가고 말았다.

온풍기 제작 라인이다. 큰 온풍기통을 옮기고 거기에 몇 가지 부품을 장착하는 첫 번째 공정이었다. 내 작업 속도가 빠른지, 더는 온풍기통을 옮겨놓을 공간이 없을 만큼 일감이 쌓였다. 난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자 저 멀리 한 정규직 여성이 잽싸게 다가와 빗자루를 쥐어준다.

"청소해."
"예? 이따 할 거잖아요."
"그래도 해. 사람들이 싫어해."
"공장 바닥 닳겠어요, 하하하."
실소하며 난 청소를 했다. 또 다른 실소의 기억은 20대 후반의 젊은 남성 정규직이 줬다. 중년인 파견 노동자에게까지도 반말을 하는 등 자주 위압적이다. 뒤에 보니 '공공의 적'이었다. 난로에 장착할 부품을 한쪽에서 다른 파견 노동자들과 조립하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상태였다. 지게차를 몰던 '공공의 적'은 경적을 울리며 내게 소리쳤다. "야, 너 일어나서 일해." 속으로 '그럴게' 하며 자세를 바꿨다. 나도 어렵지 않게 '공공'으로 포섭됐다.

사실 이곳의 정규직과 파견 노동자의 처우는 거의 같다. 시급 4천원짜리 노동자다. 다만 정규직은 상여금 600%를 받는다. 파견은 230%다. 처우가 비슷하니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이나 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파견 노동자에겐 없다. 대신 '인간에 대한 예의'가 거의 모든 갈등의 핵심이 된다.

비정규직법이나 차별 문제는 사무직 또는 대기업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정규직을 희망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24살 정원식씨는 "내년까지 다녀 정규직이 될까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내년엔 시급도 오르고 두 달에 한 번씩 90만원가량 상여금도 나오니 안정적이란 얘기다.

에필로그

육체적 고통, 침묵의 고통, 차별 따위가 라인 따라 쉴 새 없이 전해진다. 하지만 공장 라인 노동의 진정한 악질은 같은 노동자를 증오하게 하는 데 있다. 호흡이 맞지 않는 옆 노동자가 밉다. 내 공간이 좁아지며 불편해지고, 작업을 방해받는다. 나보다 쉬운 공정만 처리하며 같은 시급을 받는 또 다른 노동자들을 인사 한 번 주고받은 기억 없이 미워한다. 시간이 갈수록 더하다.

옆의 동료를 미워하게 만드는 시스템

소화 뭉치를 장착하기 위해 스크루 두 개만 박는 8번 공정과 공기통 상단부를 고정하려고 스크루 4개만 박는 7번 공정 동료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입 파견 노동자가 내 양 옆을 차지했을 땐, 내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부드러운 기계처럼 일해주길 바랐다. 아닌 표정으로 상대를 기계로 대한다. 그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내 인간성을 파괴한다.

8월 중순은 특히 더웠다. 선풍기 몇 대만 게으르게 돌고 있다. 라인이 빠르면 땀 닦을 시간도 없다. 처마 아래 빗방울처럼 심지로, 공기통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첫쨋주가 지나자 목과 오른 팔뚝에 땀띠가 생겼다. 하지만 사실 추위가 더 무섭다고들 한다. 난로가 주력인 회사에 난로 하나 없어서 자기가 구입한 털바지에 털실내화를 갖춰입어도 춥다고 정규직들은 말한다.

9월1일 아침 8시10분, 이 회사 회장의 아들인 전무가 월례 조례를 주재했다. 그는 "올해 잘하면 최대 수익을 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며 "자부심을 갖고 경쟁력을 높여달라"고 주문했다. 강당에서 정규직과 파견 노동자가 뒤섞여 선 채로 20분 넘게 들어야 했던 연설의 고갱이였다.

하지만 그런들 파견 노동자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100억원을, 1조원을 돌파해도 시급은 주근 4천원, 야근 6천원이다. '용역'들도 모르지 않는다. 나는 다만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파견 노동자들을 앉혀주고 조례를 했다면 조금은 더 귀담아들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한 사람이 허리가 아픈지 대놓고 "끄응~" 하며 몸을 숙인다.

인력회사에서 얘기하는 월급은 대부분 월~금요일, 주근과 2~3시간의 야간 잔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러면서 때때로 주말 특근까지 해야 받는 액수다. 당초 돈 쓸 시간이 없기에 절약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그건 이들 빈곤한 노동의 유일한 장점이다.

8월20일, 조립품에 손가락을 베어 연고를 사려고 약국에 들렀다. 드디어 파스도 샀다. 이튿날부턴 목과 양어깨 부위에 파스를 2개씩 붙이고 다녔다. 거른 날이 드물다. 황량한 공장 마당에도 8월 말이 되자 결결이 바람이 불었다. ㄷ인력회사 과장이 야외 휴게소에서 "이게 무슨 냄새지? 향수 냄새가 나는데" 하며 미소지었다. 옆에 있던 염철수씨가 "이건 (사방 사람들이 붙인) 파스 냄새"라고 잘라 말했다. 또 한 번의 실소를 가을 초입 바람에 한참 흘려보냈다.

"9월5일. 햇살 따갑다. 손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일곱 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이 몹시 거칠다. 손마디와 바닥이 많이 결린다. 이조차도 몇 주 뒤엔 사라질 것이다."

운명이 아닌 실험이라 다행일까

4주간의 노동을 끝낸 다음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다시 기자로 돌아갈 수 있어서라기보다, 지난 한 달이 운명이 아닌, 오직 '실험'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공장 노동자의 손금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를 사열시키는 컨베이어벨트는 영원히 쉬지 않고 돌며, 20살 여공부터 48살 가족을 책임지는 중년 남자까지 여전히 제 손금을 원망하며 나사만 하루 11시간씩 조이게 할 것이다. 그들이 선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이임사 전문

2009.7.8 이임사

친애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동료 여러분, 인권을 지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국민여러분, 저는 제 4대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원장에서 물러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2년 8개월 남짓 전인 2006년 10월 30일, 바로 이 자리에서 저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제게 주어진 3년의 법정임기를 채우겠다는 결의를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앞당겨 떠나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이 보장한 임기 만료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사유는 지난 6월 30일,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간략하게 밝혔습니다.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건대 새 정부의 출범 이래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강한 책임을 통감함과 동시에, 정부의 지원 아래 새로 취임할 후임자로 하여금 그동안 심각하게 손상된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인권의 위상을 회복하고 인권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할 전기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충정 때문입니다.

당초 취임의 변에서 말씀드렸고,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여 강조했듯이 저는 인권이란 이념적 좌도 우도 아니고, 정치적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일용할 양식인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 평범한 소신을 국가인권기구의 수장으로 지켜야 할 가장 으뜸가는 업무수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으며, 위원회와 '긴장어린 동반자'의 관계인 시민사회와도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언론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과 성의로 자료제공과 홍보활동을 할 것을 독려하고, 제 스스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소신과 노력은 극단적인 분리와 대립이 항다반사가 되어버린 세태 아래 빛을 잃었습니다. 이념적 지향이나,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존중받는 일상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쏟은 노력은 정권교체기의 혼탁한 정치기류에 막혀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설치근거나 법적 업무와 권한에 대한 성의 있는 이해를 애써 외면하는 듯한 몰상식한 비판, 무시, 편견, 왜곡의 늪 속에서 갈무리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겪은 사람이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재직 중에 얻고 쌓은 자신의 소회를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고, 당분간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라는 금언도 익히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연히 먼 장래를 기약하면서 홀로 가슴 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이 있기에 감히 몇 마디 당부와 호소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부하듯이 한동안 우리나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경이로운 나라로 국제사회의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국민의 일상을 짓누르는 군사독재의 질곡을 벗어던지고 대다수 국민이 일상적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는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권의 외연이 크게 확대되었고, 다양한 세계관과 삶의 행태가 공존하는 관용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성취는 많은 후발 국가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나 많은 나라의 시샘과 부러움을 사던 자랑스러운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근래에 들어와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부끄러운 나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 해 7월, 고국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내뱉다시피 던진 충격적인 고백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국제사회에 나가보니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이 부끄러웠다."는 유엔 수장의 솔직한 고백이 곧바로 국제인권지도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서글픈 현실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이는 정부 관료나 국민의 숫자도 많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럽기도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인권의식은 과거에 자행되던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와 같은 노골적인 인권유린의 악몽의 포로가 되어, 진정한 선진사회를 향한 전향적인 발돋움을 위해 먼저 갖추어야 할 의식의 선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권의 고귀한 가치는 정권의 교체나 연장에 따라 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권의 교체는 국민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결코 국민은 인권의 탄압이나 후퇴를 선택할 리 없습니다. 앞선 정권의 실정의 유산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반된 필연적인 변화로부터 구분해내지 못하면 때대로 시대착오적인 반인권정책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선진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1년 반이 지난 이날까지 그 장점이 만개하지 않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장으로서 느낀 소감은 적어도 인권에 관한 한, 이 정부는 의제와 의지가 부족하고, 소통의 자세나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1월, 신정부의 정식 출범에 앞서 5년의 재임기간 동안 이명박대통령이 추진할 국정과제의 청사진을 입안했던 대통령 직 인수위원회는 '과도하게 높아진' 인권위원회의 위상을 '바로잡기' 위해 법적으로 독립기관인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변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국내인권옹호자들의 반발은 물론 국제사회의 엄중한 경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2001년에 설립된 기관이기에 인권위원회는 이른바 '좌파정부'의 유산이라는 단세포적인 정치논리의 포로가 된 나머지, 1993년 유엔총회의 결의에 부응하여 설립된 기구라는 것, 권고결의 당시에 국가인권기구를 보유한 유엔위원국이 5,6개국에 불과했으나 15년이 지난 오늘에 120개국으로 급증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더라도 필연적으로 탄생했을 기관이라는 사실은 추호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제인권의 추세에 둔감한 정부이기에 지난 3월 말에는 '효율적인 운영'이라는 미명 아래 적정한 절차 없이 유엔결의가 채택한 독립성의 원칙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기구의 축소를 감행함으로써 또다시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정부 내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과 국제사회의 흐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고위공직자들조차도, 위원회를 특정목표로 삼은 명백한 보복적인 탄압에 침묵하고 심지어는 불의에 앞장서는 안타까운 현실에 실로 깊은 비애와 모멸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나라, 내 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깊더라도 국제사회에서는 내 나라, 내 정부의 입장을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임을 믿는 저이지만 그간 빚어진 실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국세사회에서 변론할 자신과 면목이 없습니다. '청구인 국가인권위원장. 피청구인 대통령'이라는 법적 형식을 취한 권한쟁의심판의 청구를 헌법재판소에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입장이 다를수록 요구되는 정부기관 간의 대화와 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이 사안을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국제적 기준에 따라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소임은 한 사안에서 나라 전체의 균형을 잡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권력의 남용과 부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일, 그것이 인권위원회의 본연의 소임입니다. 모든 국가기관을 대리하여, 약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고언을 제공하는 일,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강자와 다수자에게 생길지 모르는 약간의 불편을 무릅쓰고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국가. 인권국가, 법치국가의 본령입니다. 힘없는 자의 분노를 위무하고,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눈물을 담아내는 일에 인색한 정부는 올바른 정부가 아닙니다. 흔히 소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다수자의 인권이 더욱 중요하다고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인권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부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기재가 다수자와 강자의 관점과 이해를 옹호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간세상의 자연적 속성이기에 인권의 본질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언론에도 고언을 드립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전래의 별칭이 상징하듯이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권능은 실로 막강합니다. 그러기에 언론이 짊어져야할 책임 또한 무겁습니다. 다수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대언론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인권위원회의 생명이 업무의 독립성에 있듯이, 언론의 생명은 정확한 사실의 보도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 언론사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서도 보도는 정확한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언론의 기본양식이자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이른바 '북한인권'이나 '촛불집회'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위원회의 법적 권능에 대한 무지, 오해, 사실왜곡과 같은 부끄러운 언론행태는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동료 여러분, 인간의 존엄을 숭상하는 국민여러분, 이제 저는 물러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적 배경과 철학이 다른 두 분의 대통령의 재직 중에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독립기관의 장의 직을 수행한 행운은 여느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지 못한 특권과 축복이었습니다. 다만, 단 한 차례도 이명박대통령께 업무보고를 드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 무능한 인권위원장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제 개인의 불운과 치욕으로 삭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경하는 이명박대통령께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유엔총회가 결의를 통해 채택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의 원칙을 존중하고 국제사회의 우려에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후임자는 정부와 국민의 존중과 사랑을 받아, 지난 8년간 위원회가 범한 약간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한편, 그동안 이룩한 찬란한 업적을 발전적으로 승계하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사랑으로 저를 지켜주었던 동료들께 감사를 드리고, 위원회의 독립성을 유린하면서 강행한 정부의 폭거로 인해 창졸간에 빅장을 잃게 된 동료직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인권의 길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정권을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우리들 가슴 깊은 곳에 높은 이상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의연하게 걸어갑시다. 외롭지만 떳떳한 인권의 길을.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 분노와 아픔은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한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다집시다. 제각기 가슴에 품은 작은 칼을 벼리고 벼리면서, 창천을 향해 맘껏 검무를 펼칠 대명천지 그날을 기다립시다.

모두에게 건강하고도 화목한 가정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7월 8일
제 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 경 환

노무현 전 대통령 명연설 -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지난 2006년 4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침범했을 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발표한 '한일관계에 대한 대통령 특별 담화문' (2006.4.25)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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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환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되었던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한반도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우리땅에 군대를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을 강제로 체결하고,
토지와 한국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군사시설을 마음대로 설치했습니다.
우리 국토 일부에서 일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재정권과 외교관마저 박탈하여
우리의 주권을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망루와 전선을 가설하여 전쟁에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상태를 계속하면서 국권을 박탈하고 식민지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점령지의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

또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

 
우리는 결코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고, 그에 근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한일 간의 우호관계는 결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이들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한일간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어떤 수사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그리고 문화적인 교류도 이 벽을 녹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일간에는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가 획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그 위에서 독도기점까지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해해저 지명문제는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배타적 수역의 경계가 합의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 해역의 해저지명을 부당하게 선점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동해해저 지명문제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문제도 더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고,
결국 독도 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의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세계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전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그 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독하고 한국민의 자존을 저해하는 일본정부의 일련의 행위가
일본국민의 보편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일간의 우호관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결코 옳은 일도,
그리고 일본에게 이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냉정하고 대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로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
역사의 진실과 인류사회의 양심 앞에 솔직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이웃나라에 대해서,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에 이 기준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일본은 그 경제의 크기에 걸맞은 성숙한 나라,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선린우호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 지향속에
호혜와 평등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해왔고, 또 큰 관계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양국은 공통의 지향과 목표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해야 합니다.
양국관계를 뛰어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과 청산, 주권의 상호 존중이라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사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과감히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21세기 동북아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 평화를 향한 일본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사람, 노무현


슬프다..

400년 된 고양이 미라

벽에 갇혔던 400년 된 ‘고양이 미라’ 발견

서울신문 | 입력 2009.04.23 11:46 | 누가 봤을까? 10대 여성, 강원

 

[서울신문 나우뉴스]미신 때문에 화장실 벽에 갇혀 죽은 고양이의 사체가 미라형태로 400년 만에 발견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죽은 지 400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양이는 오래된 가정집을 보수하는 공사 도중 발견됐다고 영국 BBC방송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집의 공사를 담당했던 건축가 케빈 리드에 따르면 공사인부들이 2층 화장실 벽을 부수던 도중 죽은 고양이를 벽 사이에서 발견했다.

이 고양이는 죽기 직전까지도 발버둥을 쳤던 듯 발톱을 세우고 입을 벌린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백 년 전 이 지역에는 집의 액땜을 위해 고양이를 벽에 넣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이 고양이 역시 주술적인 이유로 당시 집주인에 의해 넣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엑세터 대학교 마술 민속학과 메리언 깁슨 박사는 "당시 이 지역에는 고양이를 집 벽에 가둬두는 것이 마녀를 내쫓고 기생충 예방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면서 "이 풍습의 잔재는 아직도 유럽 곳곳에서 미신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집의 주인은 이 고양이를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다시 넣어둘 예정이다.

담당 건축가는 "죽은 고양이를 보고 놀라긴 했지만 고양이를 넣어놓는 풍습 역시 이 지역의 고유한 전통이기 때문에 주인의 요청대로 발견 장소에 다시 넣어둘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진=메트로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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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이 고양이를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다시 넣어둘 예정이다"
400년 만에 탈줄하나 했더니, 도로 넣어지는 구나.

"이 꿈과 소망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2008년 12월 31일 mbc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 클로징 멘트 전문

: 올 한해 클로징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원칙이 숨 쉬면서 곳곳에 합리가 흐르는 사회였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책임, 신뢰, 안전이었고 힘에 대한 감시와 약자배려를 뜻합니다.
내용을 두고 논란과 찬반이 있다는 점 알고 있습니다.
불편해 하는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이 꿈과 소망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함께 가져야 하는 겁니다.

출처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61508_2687.html

美 유명평론가의 영화 <디워> 비평글

검과 마법의 시대가 끝나가는 판국에 D-WAR는 그 중 최악을 달리고 있다. 예고편은 네 주머니를 노리겠다고 했지만,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나. 오랜 시간을 들여 한국의 유명 코미디언 심형래가 각본과 감독을 한 이 작품은, 고대 이무기의 전설에 대한 심형래의 사랑을 드러내지만 21세기 미국 저널리스트가 알 바 아니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의문의 생명체가 LA에 구덩이를 판다. 이단 켄드릭은 용의 비늘을 보고 그가 어렸을 적에 대한 환상에 빠지는데, 어렸을 적 그는 그렘린 스타일의 골동품 상에서 한국제 상자를 열었다가 CG처리된 섬광을 목격하고는 그의 특별한 운명에 대해 알게된다. 가게 주인인 잭이 설명을 해주는데, 그는 500년 전 중세 한국의 전사였고 이단은 그의 제자 하람의 현생이었다. 오래전 그들은 나린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나쁜 이무기인 부라퀴와 저지드레드의 세계에서 온 듯한 미친듯이 미래적인 악의 군대로부터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웠다. 하람은 싸우다 지쳐서 그의 연인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졌다. 부라퀴는 500년만에 돌아왔고 전생한 이단과 사라(나린)를 해치려 한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사라는 이무기의 각성의 열쇠이고 이무기가 원하는 용으로의 변화의 중요한 열쇠이다. 뭐 좋아. 괴물을 피하기 위해 초현상적인 힘을 가진 잭은, 그들을 때때로 돕기만 하고, 이단에게 사라를 동굴로 데려가라고 안내한다. 그게 사라를 지키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굴에 가는 것이 사라의 운명이다. 하지만 이단은 사라를 희생하는 것에 대해 거절한다. 그는 이를 갈며, 수염도 좀 기르고, 거대 뱀과 술래잡기(이 영화에서 그나마 나은 부분)를 한다.

고대 한국의 전투신에 나오는 부대와 크리처들은 스타워즈 에피소드1과 왕의 귀환 팬들에게 친숙할 것이며, 다른 장면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금발의 사라는 거의 막을 수 없는 힘 앞에 잡힐 위기에 몰리고, 들러리들이 전부 정리된 후에 쓸만하지만 이 사태를 막는데는 별 능력도 없는 특별한 사명을 지닌 젊은이가 나타난다. 조금만 눈썰미가 있다면, 사라(코너)와 리즈가 터미네이터에게서 도망치는 얘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짝패가 시종일관 지옥의 군대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는지, 거대 뱀은 어떻게 그렇게 빌딩에서 설치고선 간단히 사라질 수 있는지는 영화의 진정한 미스테리다. 어쨋든 그걸 잘 해내서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경찰과 군대의 발견을 피할 수 있었다. 해묵은 수법대로, 그들은 이단과 사라가 하늘을 보던가 서로를 바라보며 폼잡을 땐 다가오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무기에 대한 역사적인 묘사는 '그런게 있데' 수준으로 쓰이기 때문에, D-WAR의 이무기에 대한 묘사와 표현은 그가 물 혹은 동굴에서 살고 있고 용이 되려는 포부가 있다는 수준에서 머문다. 아시아 용의 오브의 중요성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인데, 여의주 혹은 드래곤 오브는 선한 이무기를 막판에 전능한 힘을 가진 완전한 용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만 쓰인다.

버라이어티 지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화면은 볼만하다.'라는 식으로 평가했는데 이건 부모가 애들에게 칭찬할 점을 억지로 찾아줄 때 하는 방법이다. 이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 영화의 문제는 현대 세계에 신화적 용이 나왔을 때의 묘사에 있다. '레인 오브 파이어'가 더 충실했는데, 그에 반해 이 영화는 용에 대해 기사가 괴물과 맞서는 판타지 수준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여기에 웃긴 코스츔의 우주병사를 집어 넣어 부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캐릭터에 있다. 심형래가 진실로 미국인들의 돈에 관심이 있다면, 초급 영어 강좌를 들어라. '미국인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이단이 일하는 뉴스 회사 CGNN은 명백하게 CNN의 로고를 쓰고 있고, 그의 친한 친구 부르스는 농담따먹기나 하고, 총이나 챙기고 있는 보석으로 장식한 아프리칸-아메리칸이다. 서구에선 식상한 묘사다. 심은 각본을 쓸 때 실제 서구 관객이 그걸 보고 어떻게 느낄지 보다는 한국 관중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표피적인 일반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경비요원들은 덜떨어져 있고, 정부 요원들은 불친절하며, 친한 친구는 언제나 죽는다.

이런 장면도 있다. 브루스가 악의 사령관을 치어버리자 그는 밖으로 나가 그가 어떤지 살펴본다. 터미네이터의 터프가이들도 터미네이터가 주먹으로 그들의 친구의 가슴을 뚫어버리자 무작정 도망칠 정도의 머리는 가지고 있었다. 부르스는 도로 밖으로 나가 떨어지고, 이단과 사라는 다른 차를 타고 도주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그 커플은 해변을 걷고 있다. 사라가 부르스를 걱정하자 이단은 걱정할 거 없다고 대답한다. 그의 친구는 유능해서, 괜찮을 거란다. 그 다음 날에 부르스는 머리에 반창고 하나 붙이고 회사에 출근해있다. 이거 농담이라고 넣은 건가? 이런 걸 보면 D-WAR를 진지하게 볼 필요는 없다. 작가도 그의 캐릭터를 신경쓰지 않는데, 관객이 신경쓸 필요가 있겠는가. 앉아서 비명지르는 괴물이나 보면서 시간 때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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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모리스는 미국 유명 평론가이자  B급 영화 애호가란다.
내 말이.

차범근이 아들 차두리에게 쓴 글

한국에서 우리 부자의 얘기가 화제라고 한다.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갈 뿐이다.

젊은 세대, 그들의 생각과 감각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가 그들과 함께 몸을 섞고 일을 하고 있는 게 맞는 일인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요즘 TV에 나와 정신없이 떠드는 녀석이 하나 있다. 노홍철이라고. 몇 년 전,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이 친구가 왔다. 큰딸(하나) 대학 동기의 남자친구라고 하면서. 쓸데없는 얘기지만, 딸의 대학 동기는 유로 상공회의소를 거쳐 G그룹의 경영전략실에 근무하는 멀쩡한 재원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남자친구를 보자 기가 막혔다. 그런데 아이들은 재미있어 좋다고 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세대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이 노홍철이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곤혹스럽고 불편하다.

나는 10년간의 독일 분데스리가 생활 중 선발로 못 나온 게 딱 두 번 있었고, 중간에 교체돼 나온 게 한 번 있었다. 그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심하게 낙담을 했으면 감독이 그 다음 경기 전에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다음부터 너를 빼려면 미리 말해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뛰어라!"

그 당시 나에게 축구는 생활이 아니라 '밀리면 끝나는 전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 두리는 확실히 다르다. 축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생활'인 것 같다.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은.

그러니 TV 해설을 하면서 이놈은 "전 그때 후보라서 잘 몰라요"라고 멀쩡하게 얘기하는데 옆에 있는 내가 진땀이 났다.

내가 두리에게 배우는 게 하나 있다. 언젠가 자전적인 글에도 썼던 적이 있지만 '남의 행복이 커진다고 내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녀석은 항상 여유가 있다. 늘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남을 인정하는 여유가 없는 나에 비해 두리는 동료를 인정하는 여유가 있다. 그래서 두리의 삶이 나보다 더 즐거운 모양이다.

'행복이'.

두리의 e-메일 닉네임이다. 굳이 그런 이름을 쓰는 걸 보면 천성이라기보다는 행복하고 싶어 스스로 하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연예인들을 얘기하듯, 외국 축구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줄줄 꿰는 두리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스페인의 황태자비가 화면에 잡히자 '예쁘죠?'하는 말이 하고 싶어서 혼났다며, 중계를 마치자마자 황태자비의 전력에서부터 사생활까지 쫙 얘기해 준다.

두리와 함께 해설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한때 '기자'를 꿈꿀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두리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전처럼 유럽축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축구의 흐름을 읽는 거야 자신이 있지만, 선수들의 현재 상황을 팬들에게 현실감 있게 설명해 줄 경험과 정보가 부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리는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또 나와 다른 요즘 아이들의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친구들의 얘기를 하는 것이니 내가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본인도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축구선수이면서 베컴의 자서전을 머리맡에 놓고 잠들거나 지단에게 가서 공에 사인을 받고는 즐거워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선수였어도 나에게는 한번 붙어 보고 싶은 경쟁자일 뿐이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성공'에 모든 것을 두었다. 그러나 두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행복과 즐거움'이 그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부럽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그들에게 물려준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다.

논리형 말짱 DJ, 감성형 말짱 YS

논리형 말짱 DJ, 감성형 말짱 YS

말 잘하는 정치인 계보… DJ가 최고로 꼽히지만 남긴 어록은 YS가 더 많아…논리형을 잇는 심상정·최재천·유승민, 감성형은 노무현·이해찬·전여옥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이런 농담이 있다. 말을 잘해야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사기꾼과 정신과 의사 그리고 정치인이다.

그러나 정작 정치인들은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치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말은 정치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상의 방식이다. 말로 흥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말로 하루아침에 망하는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의 한마디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며 정국이 파행을 빚기도 하지만 정치인의 한 문장으로 역사가 정리되기도 한다.


“내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의 파워


현대 정치사에서 최고의 ‘말짱’ 정치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적어도 현 여야 4당 대변인의 다수는 그렇게 봤다. 우상호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DJ의 말엔 철학과 근거들이 담겨 있으면서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논리의 반전, 해학과 풍자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도 역대 최고의 말꾼으로 주저 없이 DJ를 꼽았다. 이들이 본 DJ 화법의 특징은 한마디로 논리성이다. 하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명대사가 없다.

정치사에 남을 만한 말을 많이 남긴 이는 DJ의 영원한 라이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이다.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DJ가 분석적으로 말했다면 YS는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단연 최고였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어록 가운데 단연 으뜸도 YS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일본인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못 빌린다” 등은 세기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회자된다. 단순하지만 대중이 쉽게 소화하는 게 그의 말이 가진 힘이다. 설명하는 투의 DJ의 말보다 그냥 툭 던지는 YS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의외로 상대를 설득하는 데 탁월했다며 김동길 전 자민련 고문을 최고의 말재주를 지닌 정치인으로 쳤다. 이 대변인은 DJ에 대해선 “말을 잘했지만 진정성에 항상 의구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DJ나 YS 둘 다 ‘안티’가 많다. 그만큼 말의 신뢰성도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두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지키지 못할 말을 많이 쏟아낸 탓도 크다. DJ와 YS는 말꾼의 논리형과 감성형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 최고의 말짱 정치인으로 꼽히는 DJ는 3번, YS는 두번이나 당 대변인을 지냈다. 이들의 말솜씨는 수십 년 정치 격변기를 거치며 살아남는 과정에서 머리보다 몸으로 습득한 것이다. (격동한반도새지평)


논리형 말짱 정치인은 대중에게 사태를 이해시켜주는 데 탁월하다. 민주노동당의 심상정,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한나라당의 유승민 의원이 손꼽힌다. “참 똑똑하다”는 평을 받는 정치인들이기도 하다. 토론장의 단골들이다. 여야의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방패 역할을 하면서 진가를 발휘할 때가 많다. 하지만 논리형 말꾼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보일 때가 많다.

대중은 감성형 어법을 구사하는 정치인들의 말에 더욱 빠르고 강하게 반응한다. 감성형 어법의 정치인은 심중의 소리를 그대로 뱉어낸다. 실수도 그만큼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이다. 지난 3년 동안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대통령 해먹기 힘들다” 등 숱한 말들은 대체로 너무 가볍게 말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에서 솔직하다는 평도 받았다. 2002년 대선 경선에서 이인제 의원 쪽에서 대통령 장인의 빨치산 활동을 공격하자 “그러면 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는 한마디로 색깔공세를 반전시켰다. 그의 말이 대중의 정서에 ‘꽂힌’ 것이다.


재치형 말꾼들, 박희태와 노회찬


정치인들의 감성형 어법은 그 솔직함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지만 직설적인 특성으로 종종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감정적으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 환경에서 절제되지 않은 발언들은 곧 상대방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다.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과 이해찬 열린우리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전여옥 의원의 ‘DJ 치매 발언’은 냉소적인 그의 어법이 빚어낸 많은 사고 중 하나다. 이해찬 전 총리(의원)도 대정부 질의를 받는 과정에서 한나라당을 “차떼기 정당 아니냐”라고 말해 국회를 한 달 넘게 파행으로 몰아갔다. 이들처럼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어법의 정치인들이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다. 공격적인 형태의 감성적 어법은 ‘우리 편’의 속을 후련하게 하지만 ‘반대 편’의 속을 박박 긁는 전형이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의 말이 동료 의원들의 “가슴을 후벼팔 만큼” 냉소적이지만 아주 논리적이기도 하다. 그의 화법은 논리형과 감성형이 결합됐다. 정치권 안팎에서 논리적으로 말을 참 잘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차갑다거나 냉소적이라는 지적도 받는다.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단연 최고의 말짱 정치인으로 꼽히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재치형이다. 그가 4·15 총선을 앞두고 “삼겹살 불판을 갈 때가 됐다”고 한 말은 정치개혁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노 의원의 말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어법이다. 상황을 압축하는 은유와 비유가 뛰어나다. 그는 지난 2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말에는 의외성, 반전 등의 묘미가 있어야 한다. 불필요하게 엄숙한 것은 금물이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노회찬식 화술의 철학을 소개했다. 잔잔한 웃음을 깔고 있는 재치형 화법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의 말을 미워하는 이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역대 최고의 명대변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박희태 국회 부의장(한나라당)도 재치형 말꾼이다. 그의 말씨가 좀 어눌하지만 톡톡 상황을 정리하고 반전시키는 재치가 탁월하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냐”는 그의 말은 정치판을 웃긴 ‘말말말’ 가운데 하나다. 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원도 이계진 대변인이 17대 최고의 말짱으로 꼽을 만큼 좌중을 압도하는 말솜씨를 뽐내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어서 주목받지 못했다. 또 재치 있다는 그의 어법이 현장에서는 웃고 즐기지만 나중에 기억에 남지 않는 측면도 있다. 재치형은 내용이 없다는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

재치형 화법도 공격적인 의도로 쓰이면 비아냥으로 들린다. 사석에서 노회찬 의원과 만담을 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말재주가 뛰어난 주성영 의원은 홍준표·이재오·김문수 세대와 달리 재치로 무장한 한나라당의 새로운 유형의 저격수다. 그는 “임금님과 386 배짱이” “기생층(충)” “쓰레기 언론” 등 은유와 비유가 범벅이 된 어법으로 여권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언론 등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비아냥은 당내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다.


감정 기복 없는 박근혜식 어법


말짱 정치인이라고 볼 순 없지만 나름대로 특색이 강한 어법을 구사하는 정치인들도 많다. 박근혜 대표의 말은 초등학생이 읽기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감정의 기복 없이 또박또박 읽어내려간다. 하지만 대중에게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효과면에서는 훌륭한 편이다. 반면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문화방송 앵커 출신답게 말을 잘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



△ 정치인은 대중 앞에 말로 존재한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 후보자들이 방송연설 실습을 하고 있다.


권력을 많이 가진 자의 입에 이목이 더 집중되기 마련이다. 3김의 말이 국민의 뇌리에 박힌 것도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정치를 주물러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중을 상대로 말하는 법을 오랫동안 훈련해왔고 대중은 그들의 말에 익숙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유종필 대변인의 지적은 적절하다. “권력과 권위가 있으면 자신감이 뒷받침돼 말을 잘하기 마련이다. 3김이 말을 잘하고 명언을 많이 남긴 것도 그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다.”

- 나온지 꽤 됐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게 되는 그런 기사가 있다.
오늘 심상정 의원의 인터뷰를 보고 있다가 이 기사를 다시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스크랩까지 하게 되었다.
정연하게 정리가 잘 된 좋은 글이다.

다시 박노자

[박노자칼럼] 내가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까닭

최근에 필자가 대중 강연을 했을 때 일이다. 월드컵 축구 광풍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스포츠 애국주의를 국가가 이용하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발제가 끝나고 질의 시간에 청중 한 분이 물었다. “국가간 대항전 형태의 축구 시합에 빠져드는 것이 왜 위험한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운동 경기라도 보면서 응원하지 않으면 여가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로서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이 일종의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끼치는 최악의 해악이 무엇인지 바로 그 순간에 생생하게 체감했다. 자본주의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의미하는데, 자본주의 초기나 오늘날인 자본주의 후기에 생산·소비의 주체는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최근에 순천의 하이스코나 포항의 포스코, 서울의 고속철도(KTX)에서 생존권을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현대형 천민, 비정규직들은 생산의 주된 주체가 됐지만 소비 주체에서 상당부분 배제된 상태다. 그들에 대한 과도 착취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의 모순점이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으로 남아 ‘중산층’을 자칭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과연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인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많은 경우 ‘좋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가게 되는 직장에서의 고된 근무가 끝난다고 해도, 체제가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말 잘 듣는 것’이 ‘착하다’는 것을 익히고, 학교에서는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꼭 외워야 할 정답이 하나씩만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군대에서는 ‘튀는 행동’이 신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익힌 이들은, 자본이 강요하는 노역의 시간이 끝나고도 곧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중독에 빠져든다.

소비의 대상은 재벌이 만들고 파는 소주·맥주나 백화점의 상품이 되든, 아니면 재벌이 협찬해주고 재벌의 광고가 계속 눈에 띄는 텔레비전 속의 운동 경기가 되든, 우리를 노역시켜주고 돈 쓰는 기쁨을 안겨주는 우리의 주인들, 곧 재벌들의 손을 벗어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거의 없다. 바보상자의 화면에서 국가·재벌이 고용한 현대판 검투사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처절한 싸움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눈을 감고 내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 인연에 대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고, 한반도 곳곳에 보이는 산에 올라 새들의 노래를 듣고 나무·꽃들과의 침묵의 대화를 가져볼 수도 있고, 이 땅에서 과거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문인들의 글을 천천히 음미해볼 수도 있고 ….

괴롭게 태어나고 괴롭게 죽게 돼 있는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평온과 고요함의 시간을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내향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어울릴 줄 모르는 낙오자의 설교로 들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런 기성세대가 있기에 수만 명의 10대들이 온라인 게임의 중독자나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일 것인가? 어릴 때부터 이미 폐인이 돼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텔레비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이 칼럼, 요즘 한겨레 뉴스 사이트에서 논쟁이 한창 불 붙고 있다. 자본주의를 혐오한다고 해서 만사 자본주의 탓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논객 얘기가 꽤나 설득력 있는데, 이는 작은 불씨 하나를 두고 지나치게 키워서 거대 담론으로 몰아가는 탓에 박노자를 싫어한다는 지인의 말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박노자의 글은 사회적 (속박) 관계가 버거운 내게 종종 힘이 되곤 하는데, 이 글 역시 논지의 미흡함을 떠나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나의 존재와 기쁨을 누리는 삶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 하나만 가슴에 넣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관적 메시지도 어떤 바이블 보다 마음을 다독여준다.

나는 좀, 사는 게 이 보다는 쉬웠으면 싶다. 사회의 쓴 맛 매운 맛을 모르는 낙오자의 철 없는 소망으로 들리겠지만 댄스 스탭을 밟는 것 처럼 팔다리를 나풀나풀 움직이고 살아도 평안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삶을 나는 원한다. 남는 에너지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감히 원하지만, 남들 만큼만 하고 살자는 데도 아둥바둥 매달려야 하는 사회 구조에 사실상 갇혀있기 때문에 가끔 우울하고 심통이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