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박노자

[박노자칼럼] 내가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까닭

최근에 필자가 대중 강연을 했을 때 일이다. 월드컵 축구 광풍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스포츠 애국주의를 국가가 이용하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발제가 끝나고 질의 시간에 청중 한 분이 물었다. “국가간 대항전 형태의 축구 시합에 빠져드는 것이 왜 위험한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운동 경기라도 보면서 응원하지 않으면 여가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로서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이 일종의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끼치는 최악의 해악이 무엇인지 바로 그 순간에 생생하게 체감했다. 자본주의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의미하는데, 자본주의 초기나 오늘날인 자본주의 후기에 생산·소비의 주체는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최근에 순천의 하이스코나 포항의 포스코, 서울의 고속철도(KTX)에서 생존권을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현대형 천민, 비정규직들은 생산의 주된 주체가 됐지만 소비 주체에서 상당부분 배제된 상태다. 그들에 대한 과도 착취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의 모순점이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으로 남아 ‘중산층’을 자칭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과연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인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많은 경우 ‘좋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가게 되는 직장에서의 고된 근무가 끝난다고 해도, 체제가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말 잘 듣는 것’이 ‘착하다’는 것을 익히고, 학교에서는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꼭 외워야 할 정답이 하나씩만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군대에서는 ‘튀는 행동’이 신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익힌 이들은, 자본이 강요하는 노역의 시간이 끝나고도 곧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중독에 빠져든다.

소비의 대상은 재벌이 만들고 파는 소주·맥주나 백화점의 상품이 되든, 아니면 재벌이 협찬해주고 재벌의 광고가 계속 눈에 띄는 텔레비전 속의 운동 경기가 되든, 우리를 노역시켜주고 돈 쓰는 기쁨을 안겨주는 우리의 주인들, 곧 재벌들의 손을 벗어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거의 없다. 바보상자의 화면에서 국가·재벌이 고용한 현대판 검투사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처절한 싸움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눈을 감고 내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 인연에 대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고, 한반도 곳곳에 보이는 산에 올라 새들의 노래를 듣고 나무·꽃들과의 침묵의 대화를 가져볼 수도 있고, 이 땅에서 과거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문인들의 글을 천천히 음미해볼 수도 있고 ….

괴롭게 태어나고 괴롭게 죽게 돼 있는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평온과 고요함의 시간을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내향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어울릴 줄 모르는 낙오자의 설교로 들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런 기성세대가 있기에 수만 명의 10대들이 온라인 게임의 중독자나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일 것인가? 어릴 때부터 이미 폐인이 돼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텔레비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이 칼럼, 요즘 한겨레 뉴스 사이트에서 논쟁이 한창 불 붙고 있다. 자본주의를 혐오한다고 해서 만사 자본주의 탓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논객 얘기가 꽤나 설득력 있는데, 이는 작은 불씨 하나를 두고 지나치게 키워서 거대 담론으로 몰아가는 탓에 박노자를 싫어한다는 지인의 말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박노자의 글은 사회적 (속박) 관계가 버거운 내게 종종 힘이 되곤 하는데, 이 글 역시 논지의 미흡함을 떠나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나의 존재와 기쁨을 누리는 삶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 하나만 가슴에 넣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관적 메시지도 어떤 바이블 보다 마음을 다독여준다.

나는 좀, 사는 게 이 보다는 쉬웠으면 싶다. 사회의 쓴 맛 매운 맛을 모르는 낙오자의 철 없는 소망으로 들리겠지만 댄스 스탭을 밟는 것 처럼 팔다리를 나풀나풀 움직이고 살아도 평안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삶을 나는 원한다. 남는 에너지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감히 원하지만, 남들 만큼만 하고 살자는 데도 아둥바둥 매달려야 하는 사회 구조에 사실상 갇혀있기 때문에 가끔 우울하고 심통이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