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형 말짱 DJ, 감성형 말짱 YS

논리형 말짱 DJ, 감성형 말짱 YS

말 잘하는 정치인 계보… DJ가 최고로 꼽히지만 남긴 어록은 YS가 더 많아…논리형을 잇는 심상정·최재천·유승민, 감성형은 노무현·이해찬·전여옥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이런 농담이 있다. 말을 잘해야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사기꾼과 정신과 의사 그리고 정치인이다.

그러나 정작 정치인들은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치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말은 정치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상의 방식이다. 말로 흥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말로 하루아침에 망하는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의 한마디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며 정국이 파행을 빚기도 하지만 정치인의 한 문장으로 역사가 정리되기도 한다.


“내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의 파워


현대 정치사에서 최고의 ‘말짱’ 정치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적어도 현 여야 4당 대변인의 다수는 그렇게 봤다. 우상호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DJ의 말엔 철학과 근거들이 담겨 있으면서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논리의 반전, 해학과 풍자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도 역대 최고의 말꾼으로 주저 없이 DJ를 꼽았다. 이들이 본 DJ 화법의 특징은 한마디로 논리성이다. 하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명대사가 없다.

정치사에 남을 만한 말을 많이 남긴 이는 DJ의 영원한 라이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이다.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DJ가 분석적으로 말했다면 YS는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단연 최고였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어록 가운데 단연 으뜸도 YS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일본인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못 빌린다” 등은 세기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회자된다. 단순하지만 대중이 쉽게 소화하는 게 그의 말이 가진 힘이다. 설명하는 투의 DJ의 말보다 그냥 툭 던지는 YS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의외로 상대를 설득하는 데 탁월했다며 김동길 전 자민련 고문을 최고의 말재주를 지닌 정치인으로 쳤다. 이 대변인은 DJ에 대해선 “말을 잘했지만 진정성에 항상 의구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DJ나 YS 둘 다 ‘안티’가 많다. 그만큼 말의 신뢰성도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두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지키지 못할 말을 많이 쏟아낸 탓도 크다. DJ와 YS는 말꾼의 논리형과 감성형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 최고의 말짱 정치인으로 꼽히는 DJ는 3번, YS는 두번이나 당 대변인을 지냈다. 이들의 말솜씨는 수십 년 정치 격변기를 거치며 살아남는 과정에서 머리보다 몸으로 습득한 것이다. (격동한반도새지평)


논리형 말짱 정치인은 대중에게 사태를 이해시켜주는 데 탁월하다. 민주노동당의 심상정,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한나라당의 유승민 의원이 손꼽힌다. “참 똑똑하다”는 평을 받는 정치인들이기도 하다. 토론장의 단골들이다. 여야의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방패 역할을 하면서 진가를 발휘할 때가 많다. 하지만 논리형 말꾼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보일 때가 많다.

대중은 감성형 어법을 구사하는 정치인들의 말에 더욱 빠르고 강하게 반응한다. 감성형 어법의 정치인은 심중의 소리를 그대로 뱉어낸다. 실수도 그만큼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이다. 지난 3년 동안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대통령 해먹기 힘들다” 등 숱한 말들은 대체로 너무 가볍게 말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에서 솔직하다는 평도 받았다. 2002년 대선 경선에서 이인제 의원 쪽에서 대통령 장인의 빨치산 활동을 공격하자 “그러면 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는 한마디로 색깔공세를 반전시켰다. 그의 말이 대중의 정서에 ‘꽂힌’ 것이다.


재치형 말꾼들, 박희태와 노회찬


정치인들의 감성형 어법은 그 솔직함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지만 직설적인 특성으로 종종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감정적으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 환경에서 절제되지 않은 발언들은 곧 상대방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다.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과 이해찬 열린우리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전여옥 의원의 ‘DJ 치매 발언’은 냉소적인 그의 어법이 빚어낸 많은 사고 중 하나다. 이해찬 전 총리(의원)도 대정부 질의를 받는 과정에서 한나라당을 “차떼기 정당 아니냐”라고 말해 국회를 한 달 넘게 파행으로 몰아갔다. 이들처럼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어법의 정치인들이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다. 공격적인 형태의 감성적 어법은 ‘우리 편’의 속을 후련하게 하지만 ‘반대 편’의 속을 박박 긁는 전형이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의 말이 동료 의원들의 “가슴을 후벼팔 만큼” 냉소적이지만 아주 논리적이기도 하다. 그의 화법은 논리형과 감성형이 결합됐다. 정치권 안팎에서 논리적으로 말을 참 잘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차갑다거나 냉소적이라는 지적도 받는다.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단연 최고의 말짱 정치인으로 꼽히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재치형이다. 그가 4·15 총선을 앞두고 “삼겹살 불판을 갈 때가 됐다”고 한 말은 정치개혁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노 의원의 말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어법이다. 상황을 압축하는 은유와 비유가 뛰어나다. 그는 지난 2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말에는 의외성, 반전 등의 묘미가 있어야 한다. 불필요하게 엄숙한 것은 금물이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노회찬식 화술의 철학을 소개했다. 잔잔한 웃음을 깔고 있는 재치형 화법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의 말을 미워하는 이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역대 최고의 명대변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박희태 국회 부의장(한나라당)도 재치형 말꾼이다. 그의 말씨가 좀 어눌하지만 톡톡 상황을 정리하고 반전시키는 재치가 탁월하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냐”는 그의 말은 정치판을 웃긴 ‘말말말’ 가운데 하나다. 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원도 이계진 대변인이 17대 최고의 말짱으로 꼽을 만큼 좌중을 압도하는 말솜씨를 뽐내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어서 주목받지 못했다. 또 재치 있다는 그의 어법이 현장에서는 웃고 즐기지만 나중에 기억에 남지 않는 측면도 있다. 재치형은 내용이 없다는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

재치형 화법도 공격적인 의도로 쓰이면 비아냥으로 들린다. 사석에서 노회찬 의원과 만담을 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말재주가 뛰어난 주성영 의원은 홍준표·이재오·김문수 세대와 달리 재치로 무장한 한나라당의 새로운 유형의 저격수다. 그는 “임금님과 386 배짱이” “기생층(충)” “쓰레기 언론” 등 은유와 비유가 범벅이 된 어법으로 여권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언론 등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비아냥은 당내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다.


감정 기복 없는 박근혜식 어법


말짱 정치인이라고 볼 순 없지만 나름대로 특색이 강한 어법을 구사하는 정치인들도 많다. 박근혜 대표의 말은 초등학생이 읽기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감정의 기복 없이 또박또박 읽어내려간다. 하지만 대중에게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효과면에서는 훌륭한 편이다. 반면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문화방송 앵커 출신답게 말을 잘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



△ 정치인은 대중 앞에 말로 존재한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 후보자들이 방송연설 실습을 하고 있다.


권력을 많이 가진 자의 입에 이목이 더 집중되기 마련이다. 3김의 말이 국민의 뇌리에 박힌 것도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정치를 주물러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중을 상대로 말하는 법을 오랫동안 훈련해왔고 대중은 그들의 말에 익숙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유종필 대변인의 지적은 적절하다. “권력과 권위가 있으면 자신감이 뒷받침돼 말을 잘하기 마련이다. 3김이 말을 잘하고 명언을 많이 남긴 것도 그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다.”

- 나온지 꽤 됐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게 되는 그런 기사가 있다.
오늘 심상정 의원의 인터뷰를 보고 있다가 이 기사를 다시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스크랩까지 하게 되었다.
정연하게 정리가 잘 된 좋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