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정한텐 지고 싶네, 희한하네


△ 노현정 현상은 감수성의 보수화를 상징하는 걸까. <스타골든벨>의 한 장면.

한국방송 <상상플러스>의 ‘올드 앤 뉴’에는 여자 연예인이 좀처럼 출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단 한 번, 설날 특집으로 여자 연예인들이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올드 앤 뉴’에서도 여자 연예인은 좀처럼 출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올드 앤 뉴’가 유지하는 기본 구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올드 앤 뉴’는 여성 아나운서 노현정이 게임을 통제한다. 10대와 기성세대가 서로 모르는 단어를 맞히는 퀴즈쇼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노현정은 출연자들에게 주는 힌트의 수위를 조절하고, 출연자의 답을 판정하며, 때론 출연자들의 지나친 언행을 제지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대감’이라 불리는 남자 출연자들에 의해 진행되지만, 그들의 행동의 흐름을 조절하는 건 노현정이다. 그럴수록 ‘대감’들은 더욱 웃기는 언행으로 차가운 표정의 노현정을 ‘무너뜨리려’ 노력하고, 노현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보내온 패러디 동영상의 내용처럼, 이 프로그램은 ‘여왕’과 그를 웃기려는 대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 관계가 프로그램의 기본 축을 이룬다.


여왕과 그를 웃기려는 대감들


이런 ‘올드 앤 뉴’의 성공은 남-여, 연예인-아나운서 간의 긴장관계를 이용한 퀴즈쇼 형식의 오락 프로그램들이 연속적으로 생기는 계기가 됐다. ‘올드 앤 뉴’의 노현정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온 한국방송 <스타골든벨> 역시 연예인들이 계속 냉정한 진행자인 노현정에게 무언가를 시도하는 구도로 이뤄진다. 노현정은 그들과의 ‘암산 대결’에 대부분 승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남자 연예인들은 그런 노현정에게 애정공세를 펼치며, 여자 연예인들은 노현정을 질투하며 끊임없이 노현정을 중심으로 대립관계를 만든다. 또한 문화방송 <강력추천 토요일>의 ‘무한도전’은 MC 유재석을 비롯한 남자 출연자들이 정신없는 개그를 펼치다가, 가끔씩 얼굴도 보이지 않는 여성 아나운서에 의해 상황이 정리된다.


그만큼 이 프로그램들은 ‘여성 아나운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위치’를 프로그램의 성격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여성 아나운서들은 신인이거나, 아예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개인의 힘만으로는 끼로 똘똘 뭉친 여러 명의 연예인들을 제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여성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를 프로그램의 역할과 연결시켜 그들에게 연예인들과 다른 권위를 부여한다. ‘올드 앤 뉴’에서 노현정은 위치상으로 다른 출연자들의 ‘위’에 있고, <스타골든벨>에서도 다른 연예인들과 분리된 장소에서 스크린을 통해 등장한다. 그만큼 이 프로그램들은 그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진행자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퀴즈쇼를 기본 형식으로 한 이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도전이 된다.

과거에는 이 ‘놀이판’에 끼어든 사람은 누구든 광대가 돼야 했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여성 아나운서를 통해 그런 광대 놀음을 지켜보는 또 다른 권위를 설정해놓고, 놀이의 제한선을 스스로 설정한 것이다. 그들이 벌이는 해프닝은 말 그대로 ‘여왕을 웃기는’ 수준에서 이뤄져야지, 여왕마저도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들에서 여성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권위와 연결된다. 여성, 그것도 함께 놀이판에 끼어들어야 할 여성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또 아나운서라는 전문성은 그가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프로그램 내에서 권위를 가지도록 만든다. 이는 지금까지 오락 프로그램이 여성 아나운서를 소비하는 방식과 상반된다. 보통의 오락 프로그램들은 여성 아나운서들을 최대한 연예인과 똑같이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아나운서의 전문성 대신 ‘연예인만큼’ 끼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다른 연예인들과 같은 위치에서 뒤섞여 연예인들처럼 웃겨야 오락 프로그램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즉, 단정함·엄격함·전문성 같은 이미지로 대표되는 여성 아나운서들이 오락 프로그램에서 같이 ‘망가지는’ 것이 재미의 포인트였다. 하지만 ‘올드 앤 뉴’ 같은 프로그램들은 여성 아나운서의 전문성이 만들어내는 권위를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것이다.


웃기되 끌어내지는 말지어다


한때 권위란 ‘권위주의’와 동의어나 다름없었고, 곧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젊은 연예인들은 모범적인 이미지보다는 반항적이고 톡톡 튀는 개성을 가졌을 때 더 높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찢어진 청바지보다는 잘 디자인된 슈트 차림의 연예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청소년들은 아예 교복을 거부하기보다는 ‘S라인’을 잘 살려주는 교복을 찾는다. 그리고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지만 연예인처럼 자유분방하지만은 않은, 단정하고 똑똑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가진 아나운서는 최고의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적절한 권위와 통제, 그리고 모범적인 것에 대한 호감. 모든 출연자를 망가뜨리며 웃음을 유발하는 대신 아나운서의 단정함을 재미의 포인트로 삼은 ‘올드 앤 뉴’와 그런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그대로 지킨 채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노현정의 인기는 우리 사회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반항이 곧 멋이었던 X세대의 시대에서 어느 정도는 단정하고 격식을 지키는 것이 더 멋있는 또 다른 세대의 시대로, 권위의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닌, 인정하고 ‘싶은’ 권위를 꿈꾸는 사회로 말이다.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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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믿었던 그 무엇이 '이제는' 아니라 하여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다. '영원한 사랑'이 낭만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의 파생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부터는.
어떠한 진실도 시대에 맞지 않으면 거짓이 되거나 폐기처분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영웅도 성역도 사라져버린 2006년 대한민국에는 다시 '권위'가 유행하는 구나. 다만, 세월의 변덕(?)이 죽 끓듯 하여 시대상을 따라잡으면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