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인터뷰 "타자기를 추억함"


폴 오스터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의 눈 흰자위가 마치 새처럼 활개를 폈다. 그것은 너무 하얗고 촉촉해서 거의 살아있는 별개의 생명체로 보였다. - 에디터 : 황선우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 해 여름이었다” <달의 궁전>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 장석주는 폴 오스터의 소설들이 여름에 읽을 만하다고 썼는데, 이 구절 때문인지 모르겠다. 장석주의 산문을 조금 더 옮겨보면 이렇다.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소설 따위를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쓰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니 그건 폴 오스터와 같은 친구에게 맡겨두고 나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오스터에게는 쉬워 보인다. 그는 술술 이야기 타래를 풀어내서 솔솔 귀에다가 넣어주는 세헤라자드다. 타고난 스토리텔러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 어려웠던 사람이다. <빵 굽는 타자기> 같은 책을 보면 쓰는 일의 괴로움과 고통을 제대로 바닥까지 경험해본 글쟁이가아니던가. 그리하여 폴 오스터는 지금 한국 독서계에서 가장 팬시한 하드 커버로 디자인되는 브랜드 네임인 동시에 가난한 작가지망생들의 수호성자다.

폴 오스터를 처음 만났던 것은 올해 겨울이었다. 겨울도, 말도 못하게 눈보라가 치는 뉴욕의 겨울이었다. 택시 와이퍼는 주인 앞에 선 충직한 개의 꼬리처럼 분주히 부채꼴을 그리며 움직였고, 브루클린으로 가는 다리는 자꾸만 희뿌옇게 번졌다. 한참을 헤매 도착했을 때 입이 손잡이만큼이나 부은 택시 기사에게는 두둑이 팁을 얹어줘야 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뜨리며 눈밭을 헤치고 544번지 벨을 눌렀을 때, 어두운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은 그는 예상했던 대로 책 날개의 프로필 사진보다는 머리가 세고 배가 나와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에는 100호짜리 굵은 사포로 대강 갈아놓은 것 같은 질감이 까끌했으며 코트를 받아 걸어주는 느릿한 몸짓은 퇴역 장성처럼 품위있었다.

점점 그의 존재감에 익숙해지고, 대화를 하며 표정을 살필 여유가 생기자 그때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흰자위였다. 그것은 너무 또렷하고 촉촉해서 거의 살아 있는 별개의 생명체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형형하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나 싶었다. 부엌과 작은 집무실 곁으로 응접실을 가진 아담한 2층짜리 소설가의 집은 그의 늙고 눈먼 개 잭 - <동행>의 미스터 본즈의 모델임에 분명해 보이는 - 과 포켓 부분이 반질하니 닳은 리바이스 블랙 진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근사하게 낡아 있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책들, 돋보기 안경, 독일산 담배. 소지품들이 주인의 취향을 낮게 속삭인다. 여기는 폴 오스터의 공간이다.

작은 피아노 위에서 샘 메서가 그의 타자기를 그린 유화 석 점을 발견했다. <타자기를 치켜세움>에 수록된 바로 그 그림이다. 타자기의 안부를 물었더니 여기서 볼 수 없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집필실 용도의 아파트를 하나 따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터의 하루 일과는 몹시 단순하고 아날로그적이다. 그는 매일 아침 8시면 사무실로 옮겨 가 차를 한 잔 마시고, 공책을 꺼내 그날 써야 할 분량의 글을 쓴다. 그 공책이 빨간색인지 물었다(그의 에세이 <빨간 공책>과 시집 <소멸>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소식도 전했다). 빨갛거나, 파랗거나, 여러 가지 색깔을 갖고 있단다. 그리고 12시가 넘으면 혼자 요리를 해서 허기를 다스릴 정도의 간단한 식사를 한다(‘굶기의 예술’이냐 물었더니 소리내어 웃는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어 쓴 분량이 어지간히 모이면, 가족과 그들의 생활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타자기 앞에 앉아 타이핑을 해둔다. 그가 반평생을 함께했다는 동반자, 올림피아의 오래된 모델을 가지고서.




-당신의 타자기에 대한 페티쉬를 키우고 있었는데, 직접 볼 수 없다니 서운하다. 언젠가 타자기에 쓰는 리본(잉크가 묻은 테이프)이 더이상 생산되지 않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근심을 털어놓은 바 있다. 폴 오스터가 디지털에 항복하고 아이북을 구입하는 날이 오는 건가? ‘빵 굽는 노트북’?
사실 이미 랩톱을 사서 쓰려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나와 맞지 않았다. 다행히 리본을 취급하는 문방구를 두 군데 발견하고 거기서 구할 수 있는 분량을 최대한 모아달라 했다. 그렇게 미국 전역의 한물간 타자기 용품을 우리 집에 사재기해 놓았었다. 그리고 책에서 그 이야기를 읽은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고맙게도 리본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앞으로 50년은 문제없다.

-요즘은 무엇을 쓰고 있나.
영화 시나리오 작업중이다. 젊은 프랑스 작가 두 명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파트리스 르 콩트(<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걸 온 더 브릿지>의 감독)가 뉴욕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여기 와서 영화를 찍으려는 프로젝트다.

-밀란쿤데라는 ‘절대 영화로 만들지 못할 소설을 쓰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영상으로 옮길 수 없는 문학만의 장르적 개성에 대한 고집을 세운 셈이다. 그런데 당신은 지구상에서 영화 친화적인 소설가 같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스모크>로 영화화되었으며 <블루 인 더 페이스>나 <다리 위의 룰루>는 직접 감독도 했다). 문학만으로는 부족한가?
그건 나를 위한 약 같은 거다. 3~4년 동안 쉬지 않고 소설을 몇 권 이어 쓰면 연료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데, 그럴 때 영화 작업은 나를 신선하게 만들어 다시 소설로 몰두할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들이 겪은 신기한 이야기를 수집해보자는 라디오 프로젝트도 그런 일환이었다. 시나 소설, 영화로 결과물이 나오지만 결국 나의 관심사는 이야기(스토리)다.

-당신은 늘 주인공들 속에 당신 자신의 모습을 녹여놓는다. 특히 인물 가운데 작가가 자주 등장하며, 쓴다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산문집에서도 무명 작가 시절에 처절하게 글을 써오던 것을 회고했는데, 당신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여지를 갖지 못한다. 자신이 선택한다기보다는 선택당하는 것이다. 쓰고 싶어서 쓴다기보다 써야 하니까 쓸 뿐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모든 것이 점점 더 나빠지기 때문에. 좁은 방에 틀어 박혀 혼자 앉아,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는 삶의 방식을 즐기려 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거절당하면서 사는 법을 알아가는 것이다.

-당신 소설의 인과 관계는 우연에 의해서 이끌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 내부의 의지가 아니라 신비스러운 외부의 힘에 의해 인생의 본질이 달라진다. 당신 소설에서 반복되는 이런 테마 때문에 카프카와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카프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베케트, 호손,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한다.

-다른 작가의 소설을 종종 읽는가?
책을 쓰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읽지 않는다. 그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남의 멜로디를 듣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픽션을 쓴다는 것은 철저한 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남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방향을 잃는다.

-미국 현대 탐정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를테면 <뉴욕 3부작> 같은 작품은 탐정 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사실 그건 나의 첫 소설이고 매우 오래된 작업이다. 내 소설에 탐정이 등장하기는 한다. 한때 먹고 살기 위해 다른 필명으로 탐정 소설을 써서 팔기도 했고. 하지만 내 소설에서 미스터리의 형식은 목적에 가 닿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탐정 소설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해주지만, 내 소설에서는 해답이 없으니까.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아> 같은 책은 아주 좋아한다.


-테러와 전쟁, 츠나미. 인류는 속속 재앙의 공격을 받고 있다. 지금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나?
비관적이다. 게다가 이 나라는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아놓았다. 나는 선거 과정에서 뭔가 음모가 있었을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을까? 문학은 글의 힘으로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희망은 개개의 인간이다. 휴머니티는 어려움 속에도 결국 길을 찾을 것이다.



격앙되어 지난해의 선거의 재앙을 곱씹던 그는 오디오로 다가가 CD를 걸었다. 잠시 후, 자신이 노랫말을 짓고 브루클린의 어느 바 주인이 불렀다는 안티 부시 송이 흘러나왔다. 노래가 끝나자 나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CD를 선물했다. 폴 오스터 문학에서 영감을 얻은 재즈와 모던 록을 모으고, 거기에 블레이크락의 ‘문라이트’ 그림을 표지로 얹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받아들고서 그는 처음으로 천진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화와 눈이 켜켜이 쌓여갔다. 인터뷰 중간에 그는 잠깐 장을 보고 돌아온 아내를 맞느라 자리를 비웠었다. 마찬가지로 소설가인 시리 허스트베트는 노르웨이 출신의 미인이었다. 첫눈에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한 오스터는, 지금의 아내가 없었다면 자신이 <유리의 도시> 의 독신 남자 퀸처럼 뒤죽박죽으로 고독하게 살고 있었을 거라 했다.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프랑스 시에다 곡을 지어 앨범을 냈다는 열일곱 살짜리 딸 소피의 노래를 들었고, 그의 소설보다 더 희한한 몇 가지 우연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일은 늘 일어나지, 늘 일어나.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이상해.”

<달의 궁전>에서 오스터는 예술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운행의 방향이 불투명한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연약하기 그지없다. 인정하기 두렵지만 삶이란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글을 씀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문학이란, 그렇게 희망 없는 희망이며, 세상의 모든 무의미와 고독하게 싸우는 일일 것이다.

저녁 빛을 받은 눈은 오스터의 인광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출처 : W코리아 2005년 3월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