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선셋 영화평 "당신은 헛것이다"


2004년
나는 서른셋, 직장생활 8년차의 샐러리맨이 되어있습니다.

그간 수많은 영화를 더 보았지만
'내 인생의 영화'목록에 더이상 등재되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이십대초반의 언저리에 그것들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피, 길버트 그레이프, 애정만세...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가 있습니다.
스물넷의 나는 우연히 비포선라이즈를 보았지만
서른셋이 되어서는 작정하고 비포선셋을 기다립니다.
상영관 검색을 하다가도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극장과 시간만 확인하고 얼른 인터넷창을 닫습니다.

이번엔 통신사 할인금액 오천원짜리 표를 사서 극장에 앉았습니다.
예고가 나가고 상영시간이 임박하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나 왜 이러지...
그러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유아이피의 로고가 뜹니다.
공간입니다.
공간에서 시작합니다.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은 그들이 떠난 공간을 한 군데씩
환기시키는 씬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 다른 공간들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곧,

에단 호크 등장.
이런!
붉은 염소수염을 달고 배를 긁적이던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줄리 델피의 첫 등장은 둘의 재회와 동시에 이루어져
제대로 그녀를 뜯어볼 수 없었습니다.
9년만입니다.
아, 9년이라니...
일년에 한번씩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나요.."라고
문득, 신파조로 되뇌인다 해도 9번은 너무 많습니다.

이번에도 시한폭탄입니다.
게다가 더 지독한 시한폭탄입니다. 남은 시간은 한시간 남짓.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주인공은 비행기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채근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니멀리즘입니다,
비포선셋에 비하면 애정만세의 그것은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인물을 따라가는 전면 트래블링 투샷과 가끔 나오는 원샷,
후면 투삿이 대부분, 그들의 표정과 말의 리듬이야말로
스펙타클입니다.

끝없는 말의 성찬 끝에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불행을 경쟁적으로 과시하며
상대를, 그리고 자신을 무장해제시킵니다.
마지막 카운터 펀치.
줄리 델피는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G코드나 D마이너를 짚으면서 노래하는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나는 충동적으로 극장을 다시 찾을 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모두 러시안 인형입니다.
줄리 델피 속의 줄리 델피 속의 줄리 델피 속의 줄리 델피....
에단 호크 속의 에...에.....
늘어선 수천개의 러시안 인형 중에는 물기로 가득차 있어
건드리기만 하면 눈물이 줄줄 새어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절의 피부는 얼마나 맑고 투명합니까.
그들은 약속한 듯 나이먹는게 좋다고
세월을 긍정합니다. 나는 하마터면
나도 그래..
라고 혼잣말을 할 뻔 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진심이기도 합니다.
잔주름따위가 그 아름다움을 훼손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춘이
이제 막 모퉁이를 돌고 있습니다.
돌아서 사라지려다가 문득,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봅니다.
그리고는 입술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혹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좋습니다...오케이.
나는 못말리게 질척거리는 로맨티스트라 치고
느끼하게 뒤늦은 립싱크를 해 봅니다.

"사랑이 없으면 당신은 헛것이다"


-출처 : 네이버, burself님의 글


옳고 또 옳다. 이 글을 먼저 보지 않았다면 분명 <비포 선셋>에 대한 글을 썼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100% 동감. 그 외 남는 부분은 개인적인 연애사와 관계된 얘기가 될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일종의 타이밍이 아닌가 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온 이 영화에 나는 기꺼히 '내 인생의 영화'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물론 그럴 자격이 충분한 영화다.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다시 보았는데, 친구에게 얘기를 들어서도 알았지만 자막이 정말 엉망진창, 거의 재난 수준이다. 그 자막 만으로 영화가 싫었다는 사람, 심지어 좋았다는 사람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도 영화로 봤을 때는 어디서 생략되고 오역됐는지 몰랐을 만큼의 영어 실력 아닌가!!) 물론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1시간 20분 남짓의 러닝타임이지만 대사량은 액션영화의 10배는 족히 넘는다. 그것을 2~3초 상간에 2줄 남짓 허락되는 분량으로 소화시켜야 했을 거란 말이지. 하지만 오역도 심각하다. avi 파일 자막과 필름 자막을 비교하며 보고 있노라니 의미에 심한 혼선이 왔다. 어째서 같은 영어를 번역하는 데 인터넷 버전은 남편이고 상영관 버전은 남자친구란 말이냐 버럭! 이런 게 어디 한 두개여야 말이지. 조만간 대본을 구하여 보는 것이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