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 <金裕貞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이상을 다시 읽는다.
1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사무친다.

이상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다. 계기는
(무슨 말인지 한자 한자 씹어봐야하는 위대한 시 작문들이 아니라)
'권태'를 비롯한 몇몇 수필들이다.
특히, 너무나 모던하고 유쾌한 농담, 거기에 홀딱 반하였었다.
수필 곳곳에 발견되는 위트와 익살의 위력은 그 글들을 처음 접한지
십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대단하다.
-제아무리 감명깊던 글도 십년만에 읽으면 다 시시해지곤 하였는데.
농담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그전에는 몰랐다.  
'자조와 해학, 그리고 명석함’ -농담이란 그런 것이다. 농담을 하려거든 이렇게 해야한다.


특히, 절친했던 김유정에 관한 수필은 가공할만한 농담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결코 짧지 않은 이글을 옮기면서 나는, 너무나 즐겁다. 행복하다.

그나저나, 이 분들 정말 사랑스럽지 않은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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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金裕貞)
ㅡ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암만 해도 성을 안 낼 뿐만 아니라, 누구를 대할 때든지 늘 좋은 낯으로 해야 쓰느니 하느 타입의 우수한 견본이 김기림이라.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업신여기고 그만두는, 그렇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업신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진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 “여! 어디 덤벼봐라”쯤 할 줄 아는, 하되 그저 그럴 줄 알다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는 파에, 고만 이유로 코밑에 수염을 저축한 정지용이 있다.
모자를 훽 벗어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따구니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侑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

누구든지 속지 마라. 이 시인 가운데 쌍벽과 소설가 중 쌍벽은 약속하고 분만된 듯이 교만하다.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지, 기실은 그 교만에서 산출된 표정의 데포르마시옹 외의 아무것도 아니니까,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이분들을 설복할 아무런 학설도 이 천하에는 없다. 이렇게들 또 고집이 세다.
나는 자고로 이렇게 교만하고 고집 센 예술가를 좋아한다. 큰 예술가는 그저 누구보다도 교만해야 한다는 내 지론이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 분들과 친한 나 불초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의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잇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치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
작품 이외의 이분들의 일을 적확히 묘파해서 내 비교교우학을 결정적으로 여실히 하겠다는 비장한 복안이어늘,

소설을 쓸 작정이다. 네 분들을 각각 주인으로 하는 네 편의 소설이다.
그런데, 족보에 없는 비평가 김문집 선생이 내 소설에 59점이라는 좀 참담한 채점을 해놓으셨다. 59점이면 낙제다. 한 끗만 더했더면 -그러니까 서울말로 ‘낙제 첫찌’다.
나는 참 낙담했습니다. 다시는 소설을 안 쓸 작정입니다 -는 즉 거짓말이고, 이 경우에 내 어쭙잖은 글이 네 분의 심사를 건드린다거나, 읽는 이들의 조소를 산다거나 하지나 않을까 생각을 하니, 아닌게아니라 등어리가 꽤 서늘하다.

그렇거든, 59점짜리가 그럼 그렇지 하고 그저 눌러 넣어주어야겠고, 뜻밖에 제법 되었거든 네 분이 선봉을 서서 김문집 선생께 좀 잘 좀 말해주셔서, 부디 급제를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김유정篇


이 유정은 겨울이면 모자를 쓰지 않느다. 그러면 탈모인가? 그의 그 더벅머리 위에는 참 우글쭈글한 벙거지가 얹혀 있는 것이다. 나는 걸핏하면,
“김형, 그 김형이 쓰신 모자는 모자가 아닙니다.”
“김형(이 김형이라는 호칭은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거 어떡하시는 말씀입니까?”
“거 벙거지, 벙거지지요.”
“벙거지! 벙거지! 옳습니다.”
태원도 회남도 유정의 모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벙거지라고 밖에!

엔간해서 술이 잘 안 취하는데, 취하기만 하면 딴 사람이 되고 만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아느냐 하면 ㅡ
보통으로 주먹을 쥐고 쓱 둘째손가락만 쪽 펴면 사람 가리키는 신호가 되는데, 이래가지고는 그 벙거지 차양 밑을 우벼파면서 나사못 박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하릴없이 젖먹이 곤지곤지 형용임에 틀림없다.


창문사에서 내가 집무랍시고 하는 중에 떠억 나를 찾아온다. 와서는 내 집무 책상 앞에 마주 앉는다. 앉아서는 바윗덩어리처럼 말이 없다. 낸들 또 무슨 그리 신통한 이야기가 있으리요, 그저 서로 벙벙이 앉았는 동안에 나는 나대로 교정 등속 일을 한다. 가지가지 부호를 써서 내가 교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불쑥
“김형! 거 지금 그 표는 어떡허라는 푠가요?”
이런다. 그럼 나는 기가 막혀서,
“이거요, 글자가 곤두섰으니, 바로 놓으란 표지요.”
하고 나서는 또 그만이다. 이렇게 평소의 유정은 뚱보다. 이런 양반이 그 곤지곤지만 시작되면 통성을 다시 해야 한다.



그날 나도 초저녁에 술을 좀 먹고 곤해서 한창 자는데, 별안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시나 가까웠는데 ㅡ하고 눈을 비비고 나가 보니까, 유정이 B군과 S군과 작반해와서 이 야단이 아닌가? 유정은 연해 성히 곤지곤지중이다. 나는 일견에 “이키! 이건 곤지곤지구나”하고, 내심 벌써 각오한 바가 있자니까 나가잔다.
“김형!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허십시다.”
“아따, 그러십시다그려.”
이래서, 나도 내 벙거지를 쓰고 나섰다.

나는 단박에 취해버려서, 역시 그 비장의 가요를 기탄없이 내뽑은가 싶다. 이렇게 밤이 늦었는데, 가무음곡(歌舞音曲)으로써 가구(街衢)를 소란케하는 것은 법규상 안 된다. 그래 주파(酒婆)가 이러니저러니 좀 했더니, S군과 B군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언사로 주파를 탄압하면 유정은 또 주파를 의미깊게 흘낏 한번 흘겨보더니,
“김형! 우리 소리합시다.”
하고, 그 척척 붙어 올라올 것 같은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 아리랑 팔만구암자를 내뿜는다. 이 유정의 강원도 아리랑은 바야흐로 천하일품의 경지다.

나는 소독저로 추어(鯫魚) 보시깃전을 갈기면서 장단을 맞춰 좋아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쪽에서 S군과 B군이 불화다. 취중 문학담이 자연 아마 그리 된 모양인데, 부전부전하게 유정이 또 거기 가 한몫 끼이는 것이다. 나는 “술들이나 먹지 저 왜들 저러누”하고 서서 보고만 있자니까, 유정이 예의 그 벙거지를 떡 벗어던지더니, 두루마기․마고자․저고리를 차례로 벗어젖히고는 S군과 맞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싸움의 테마는 아마 춘원(春園)의 문학적 가치 운운이던 모양인데, 어쨌든 피차 어지간히들 취중이라, 문학은 저리 집어치우고 인제는 문제는 체력이다. 뺨도 치고 제법 태껸들도 한다. B군은 이리 비칠 저리 비칠 하면서 유정의 착의일식(着衣一式)을 주워들고 바로 바로 뜯어말린답시고 한가운데 가 끼여서 꾸기적꾸기적하는데, 가는 발길 오는 발길에 이래저래 피해가 많다.

놀란 것은 주파(酒婆)와 나다.
주파는 술은 더 못 팔아도 좋으니, 이분들을 좀 밖으로 모셔내라는 애원이다. 나는 S군과 협력해서 가까스로 용사들을 밖으로 끌고나오기는 나왔으나, 이번에는 자동차가 줄대서 왕래하는 대로(大路) 한 복판에서들 활약이다. 구경꾼이 금시로 모여든다. 용사들의 사기는 백열화(白熱化)한다.


나는 섣불리 좀 뜯어말리는 체하다가, 얼떨결에 벙거지 벗어진 것이 당장 용사들의 군용화에 유린을 당하고 말았다. 그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전선주에 가 기대서서 이 만화를 서서히 감상하자니까ㅡ
B군은 이건 또 언제 어디서 획득했는지 모를 5홉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내휘두르듯 하면서 중재중인데, 여전히 피해가 많다. B군은 이윽고 술병을 한 번 허공에 한층 높이 내휘두르더니, 그 우렁찬 목소리로 산명곡응(山鳴谷應)하라고 최후의 대갈일성(大喝一聲)을 시험해도 전황은 여전하다.

B군은 그만 화가 벌컥 난 모양이다. 그 술병을 지면 위에다 내던지고 가로되,
“네놈들을 내 한꺼번에 쥐기겠다.”
고 결의의 빛을 표시하더니, 좌충우돌로 동에 뻔쩍 서에 뻔쩍, S군․유정의 분간이 없이 막 구타하기 시작이다.
이 광경을 본 나도 놀랐거니와, 더욱 놀란 것은 전사 두 사람이다. 여태껏 싸움 말리는 역할을 하노라고 하던 B군이 별안간 이처럼 태도를 표변하니, 교전하던 양인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B군은 위선 유정의 턱밑을 주먹으로 공격했다. 경악한 유정은 방어의 자세를 취하면서 한쪽으로 비키니까, B군은 이번에는 S군을 걷어찼다. S군은 눈이 뚱그래서 이 역(亦) 한편으로 비키면서 이건 또 무슨 생각으로,
“너! 유정이! 뎀벼라!.”
“오냐, S! 너! 나한테 좀 맞아봐라.”
하면서 원래의 적이 다시금 달라붙으니까 B군은 그냥 두 사람을 얼러서 걷어차면서 주먹비를 내리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공세를 B군에게로 모아가지고 쉽사리 B군을 격퇴한 다음, 이어 본전(本戰)을 계속 중에 B군은 이번에는 S군의 불두덩을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수행하니까, 이 틈을 타서 유정은 S군에게 이 또한 그만 못지않은 일축을 결행한다. 이러한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ㅡ


이것은 그냥 상상만으로도 족히 포복절도할 절경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만 내 벙거지가 여지없이 파멸한 것은 활연히 잊어버리고, 웃음보가 곧 터질 지경인 것을 억지로 참고 있자니까, 사람은 점점 꼬여드는데, 이 진무류(珍無類)의 혼전은 언제나 끝날는지 자못 묘연하다.


이때 옆골목으로부터 순행하던 경관이 칼소리를 내면서 나왔다. 나와서 가만히 보니까, 이건 싸움인 모양인데,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경관도 기가 막혀서
“이게 날이 너무 춥더니 실신들을 헌 게로군.”
하는 모양으로 뒷짐을 지고 한참이나 원망(遠望)한 끝에 대갈일성,
“가에렛!”
나는 이 추운 날 유치장에를 들어갔다가는 큰일이겠으므로,
“곧 집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용서하십쇼. 술들이 몹시 취해 그렇습니다.”하고 고두백배(叩頭百拜)한 것이다.
경관의 두 번째 ‘가에렛’ 소리에 겨우 이 삼국지(三國志)는 아마 종식하였던가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태원이 “거 요꼬미쯔리이찌의 <기계(機械)> 같소그려”하였다. (물론, 이 세 동무는 그 이튿날은 언제 그런 일 있었더냐는 듯이 계속하여 정다웠다.)



유정은 폐가 거의 결딴이 나다시피 못 쓰게 되었다. 그가 웃통 벗을 것을 보았는데, 기구한 수신(瘦身)이 나와 비슷하다. 늘
“김형이 그저 두 달만 약주를 끊었으면 건강해질텐데.”
해도 막무가내더니, 지난 7월달부터 마음을 돌려 정릉리 어느 절간에 숨어 정양중이라니, 추풍(秋風)이 점기(漸起)에 건강한 유정을 맞을 생각을 하면, 나도 함께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