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파울로 코엘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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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살아있어. 이제 모든 게 다시 시작되는 거야. 내가 완전히 정상이라는 걸 그들이 확인할 때까지. 난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야 할 거야. 때가 되면 퇴원허가서를 발부해줄 테까지.

그럼 난 류블랴나의 거리들, 원형광장, 다리들, 일터를 오가는 행인들을 다시 보게 되겠지. …사람들은 언제나 -오로지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성향이 있으니까. 도서관의 일자리도 내게 되돌려주겠지.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똑같은 바, 똑같은 나이트클럽에 드나들 거야. 친구들과 세상의 불의와 문제점에 대해 토론도 벌이고, 호수 주변을 산책하기도 하겠지.

알약을 선택한 덕분에, 내게 자살의 흔적은 남지 않았어. 난 여전히 젊고, 예쁘고, 총명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난 쉽게 남자들을 사귈 수 있을 거야. 남자의 집이나 숲속에서 사랑을 나누겠지. 어느 정도 쾌락을 맛볼 순 있을 거야. 하지만 오르가슴이 지나가고 나면 공허감이 밀려오겠지.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질 거고, 그나 나나 핑계거리를 -“늦었군”. 혹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같은- 내세울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 우리는 서로의 눈길을 피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서둘러 헤어질 거야.

수녀원의 내 방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애쓰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매번 똑같은 프로그램을 볼 거야. 전 날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자명종을 맞추겠지. 도서관에서는 내게 맡겨진 일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거야. 난 극장 맞은편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을거야. 언제나 똑같은 벤치에 앉아서. 역시 점심을 먹으려고 똑같은 벤치를 택해 앉는 여자들, 시선은 언제나 텅 비어 있지만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에 몰두하는 척하는 다른 여자들 곁에서.

난 다시 일터로 돌아가겠지. 난 누가 누구와 데이트를 했고, 누가 무슨 일로 괴로워하고 있고, 아무개씨가 남편 때문에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는 등의 험담에 귀를 기울이겠지. 나는 내가 특권을 누리는 여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될 거야. 예쁘고, 안정된 직업이 있고, 원하면 언제든 남자를 유혹할 수 있으니까. 퇴근 후면 다시 술집들을 전전할 거야. 그리고는 모든 게 다시 시작되겠지.

내 자살 시도 때문에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을 엄마는 조금씩 공포에서 벗어나,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결국 따지고 보면 산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대겠지. “날 좀 봐라. 네 아빠와 오래 전에 결혼해서 가능한 한 최고의 본보기가 되려고, 너한테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고 애썼잖니.”

엄마가 매번 늘어놓는 똑같은 잔소리에 지쳐서, 그리고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에, 어느 날 난 사랑하는 한 남자와 마지못해 결혼을 하게 되겠지. 우리의 미래, 우리의 시골별장,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함께 꿈꾸면서 말이야.

결혼 첫해에는 자주 사랑을 나누겠지. 두 번째 해에는조금 시들해질테고, 그렇게 이 년이 지나면 아마 보름에 한 번씩 섹스를 생각하고 한 달에 한 번 실행에 옮기게 될 거야. 상황이 더 나빠지면 우린 서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난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될거야 -난 더 이상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니까. 나는 아랑곳 않고 끊임없이 그는 자기 친구들에 대해, 마치 그들이 그의 진정한 세계라도 되는 양 떠들어댈 테니까.

우리의 결혼 생활이 아슬아슬한 지경에 이를 때쯤, 난 임신을 하게 될 거야.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한동안은 서로 더 가깝게 지내겠지. 하지만 상황은 곧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거야.  

그때쯤이면, 난 어제 -또는 그저께,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얘기를 들었던 그 간호사의 숙모처럼 몸이 불기 시작할 거야. 다이어트를 시도하겠지만 매일, 매주,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불어나는 체중에 난 두  손을 들고 말거야. 그리고는 우울증에 바지지 않게 해주는 그 마법의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겠지.

마지못해 서둘러 치른 관계를 통해 애도 한둘쯤은 더 생길 거야. 난 모두에게 말하겠지. 아이들 때문에 산다고. 실제로도 아이들 때문에 살 수 밖에 없을 테고.
사람들은 우리를 여전히 행복한 부부로 여기겠지. 하지만 그 행복의 겉껍질 안에 숨겨진 고독, 회한, 체념은 아무도 모를 거야.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걸 눈치채고 간호사의 숙모처럼 한바탕 소란을 피우거나 또다시 자살을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때쯤이면 난 늙고 비겁해져 있을 거고, 날 필요로 하는 두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을 거야. 아이들을 키워 자리잡게 하기 전에는 난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치 못하겠지. 그래, 난 자살하지 못할 거야. 기껏해야 소란을 피우며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위협하겠지. 그러면 그는, 모든 다른 남자들처럼 한발 물러설 거야. 나를 사랑한다고,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다짐하겠지. 그는 추호도 생각지 못할 거야. 내가 진짜 떠나기로 결심하다라고,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며, 자잘한 결점은 있어도 그만한 남편이 어디 있고 또 애들의 상처는 얼마나 크겠느냐며, 엄마가 하루 종일 늘어놓는 한탄조의 잔소리를 들으며 부모 집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 외에 내겐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이 삼년이 지나면, 남편에게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날 거야. 나는 또 다시 그 사실을 알게 되겠지 -내가 직접 목격하거나 누군가의 고자질을 통해- . 하지만 이번엔 난 모르는 척하게 될거야. 첫 여자가 나타났을 대 온힘을 다해 싸웠는데도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면 차라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가하게 될거야. 엄마가 옳았다고 말이지.

그는 여전히 자상한 남편일거야. 나도 계속 도서관에 나가 일을 하겠지. 극장 앞 광장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끝까지 읽지 못할 책들을 붙들고 씨름을 하고, 10년, 20년, 50년이 지나도 똑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겠지. 단, 샌드위치를 삼킬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릴 거야. 계속 몸이 불 테니까. 남편은 내가 아이들을 돌봐주기를 바랄 테니 술집에도 더 이상 갈 수 없을 거야.

그때쯤이면, 난 행동에 옮길 용기는 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자살을 생각하며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거야. 어느 날 나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라는, 삶은 아무 것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거야. 그리고는 삶에 적응해가겠지.‘


베로니카는 마음속 독백을 끝내고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살아서 빌레트를 나서지 않으리라. 아직 죽을 용기와 힘이 있는 동안, 빨리 끝내는 편이 나았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저. p. 32~36에서




++ 하- 이쯤되면 자살해야지. 암.
슬로베니아처럼 멀고 이질적인 곳에서도
사람 사는 게 이토록 똑같다니 충격이다.

그나저나, 자살 외엔 방법이 없나? ...결혼을 안 하는 건 어떨까.

'그래봤자 달라질 건 없어..'로 시작하는 베로니카식 긴 독백이 나오려해서 그만 쓸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