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표지이야기-노동 OTL]
종일 12시간 서서 일하면 떼어내고 싶어지는 몸과 머리…
감시 속에 말조차 잃은 단절의 작업장에서 보낸 한달



'4천원짜리 인간'들이 있다. 2009년 최저 임금인 시급 4천원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언론은 가난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종종 전해왔지만,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틈은 무장 벌어지기만 한다. '워킹푸어'(working poor)는 2년전 이미 3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왔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동트기 전에 출근해 별을 보며 퇴근해도 가난은 결코 저물지 않는 이들이다.

< 한겨레21 > 은 그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를 구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부닥치고 일했다. 그 돈으로 한 달 생활을 직접 꾸려보았다. 첫 번째 일터는 경기 안산 지역 공단의 중소기업 생산직이었다. 지난 7월 하순부터 구직 활동을 시작해 8월6일부터 9월5일까지 일했다.

시급 4천원의 노동자가 생존을 넘어 생활로, 생활을 넘어 행복으로 다가가는 게 가능할지 가늠해본 한 달간의 기록을 세차례에 걸쳐 전한다. 10월에는 일터를 옮겨 또 다른 '슬픈 노동'의 현장을 전하는 2부가 이어진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① 작업 라인의 노예
② 4천원의 삶과 행복
③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한철,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값싼 '을'이었다.
1970~80년대 공장 노동이 '여공'과 '미싱'으로 상징된다면, 지금은 전동 드라이버다. 계절 따라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공장 시계 돌아가는 소리는 아니 들리고, 일주일에 7일, 하루 12시간씩 나사 돌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곡절 끝에 취업한 A사, 대부분의 여공 손에도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다.

날 알선해준 '갑'(ㄷ용역회사)의 ㅇ과장은 "한 달에 140만원 플러스 알파, 그래서 170만원까지 받아간다"고 설명하며 액수를 메모까지 해줬다. 지난 8월11일 아침 7시30분께 서명한 계약서 뒷면에 그가 볼펜으로 끼적인 '희망'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 희망이 얼마나 고되며, 또한 야망에 가까운지 깨닫기까진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8시30분 종소리와 함께 라인에 서다

난 계약서를 쓰자마자 A사로 '배달'됐다. 함께 '을'이 되어 공장에 온 무리는 다른 인력회사에서 온 이들을 포함해 19명이었다. 이들은 통상 '용역'으로 불린다. 인력회사 관리들이 줄을 세웠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자 A사 생산부장이 와 사열해 있는 우리를 뭉텅뭉텅 갈랐다. A사는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석유난로·냉장고·비데 등 여러 가전제품을 컨베이어벨트 따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탄탄한 중소기업이다. 나는 다른 6명과 함께 '라인 55R'에 배치됐다. 이 회사의 주력사업인 중소형 석유난로 제작 라인이다.

'아, 마음의 준비가 덜됐는데….' 아찔해하고 있을 찰나 종이 울렸다. 정확히 아침 8시30분, 탱크 바퀴처럼 육중한 라인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겐) 기습적으로 시작된 첫 공장 근무는, 급류에 떠밀리듯 허우적대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오전 10시가 되자 허기로 멍해졌고, 11시가 되자 다리를, 오후로 들어서자 머리를 떼어내고 싶었다. 한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작업하는 상체를 받치는 다리가 꺾일 것 같았다. 사타구니 높이의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난로를 내려다봐야 하는 머리는 불필요하게 무거웠다. 오직 한마디만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단전돼라, 단전돼라, 신이시여 단전되게 하옵소서.'

텅 비우지 않으면, 머리를 기어코 컨베이어벨트 위로 내동댕이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즈음, 30대 후반의 반장은 "오늘 잔업은 9시"라고 알렸다. 오후 4시 남짓이었다. 이후 5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

휴대전화를 꺼내 처음으로 시간을 봤던(작업 중 휴대전화를 꺼내는 이는 거의 정규직이라고 보면 된다) 8월19일의 기억이 선명하다. 오후 6시 야간 잔업이 시작되고 밤 9시가 멀었나 싶어 시계를 보면 7시10분이었고, 9시가 됐나 싶어 시계를 보면 8시였으며, 9시가 됐겠지 싶어 시계를 보니 8시40분이었다. 9시 라인이 멈추자마자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은 없다.'

난로 제작 라인에서 내게 맡겨진 일은 간단하다. 아니 30~40명 작업자 모두의 일이 간단하다. 드라이버로 나사 두 개만 박는 이도 있었다. 내 작업표준서를 보면, '9번 공정'으로 '동편심 검사'라고 적혀 있다. 옆 공정에서 석유난로의 공기통에 심지를 끼워 전달하면, 나는 공기통 높이가 일정한지(동심), 공기통이 쏠리진 않았는지(편심), 심지의 높이는 일정한지(심지)를 육안, 링, 디지털 게이지 등을 이용해 검사한다.

보람도 사회적 자존감도 없는 노동

그래서 심지 높이가 7~9mm 범위를 벗어나면 펜치로 심지를 집어올리거나 쇠주걱으로 눌러내린다. 편심 허용 범위(3.95~4.75mm)를 벗어나면 쇠주걱으로 좁은 곳을 벌려준다. 그러면서 이제 갓 '엔진'을 단 난로 하나당 두세 번씩 손잡이를 돌려 심지가 올라오는 것을 살핀다. 그리고 공기통 캡을 '꼬챙이'라는 도구로 공기통에 고정한다. 대략 1분 안팎에 서둘러 해야 할 일들이다.

무엇보다 초반엔 서서 일하는 고통을 버티기 힘들었다. 노동 세계엔 서서 일하는 저주받은 자와 앉아 일하는 복된 자, 두 부류만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2주 정도 지나자 좀 익숙해진다. 이후에 경기 수원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노동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앉아서 일해도 집에 가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하소연했다. 첫쨋주에 발바닥·목·어깨가 쑤셨고, 3주차로 접어들자 허리도 아팠다. 일곱 군데에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과 손마디는 지금도 통증을 느낀다.

물론 '라인'은 '인간'을 개의치 않는다. 붕어빵 찍어주듯 물량이 내게 건네진다. 오전 8시30분~10시30분 A타임에도, 10시40분~12시30분 B타임에도, 점심 먹고 오후 1시30분~3시30분 C타임에도, 3시40분~5시30분 D타임에도, 그리고 30분 저녁 식사 뒤 6시부터 저녁 8시나 9시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야간 잔업 때도 기계처럼 서서 목장갑이 닳도록 손잡이를 돌리고, 펜치를 쥐며 쇠주걱을 들이댄다.

안산에서 만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일의 보람이나 사회적 자존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다시금 '공순이' '공돌이'란 사회적 비하가 유행한대도, 이들은 침묵으로 '내면화'할 것이다. 별이 뜬 퇴근길은 그저 피곤하다.

일해도 가난한 노동자에게 희망은 오직 돈이다. 나부터도 날품으로 팔려가는 계약서에 서명할 때 '170만원'만 눈에 들어왔다. 올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인 132만7천원을 훨씬 웃돌지 않나.

1. 시급 4천원, 상여금 230%, 임금 지급일 매월 11일
2. 근로시간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휴게 시간 12시30분~1시30분)
3.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을과 합의하여 1주일에 12시간을 한도로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4.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을의 의견을 들어 근무 장소 또는 업무를 변경할 수 있다.

5. 정규작업 시간 이외에 야간근로 및 휴일근로를 실시하는 것에 동의한다.
6. 최초 1개월 미만 근무시 작업복 대금 1만5천원을 공제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갑'이 내게 준 계약서 조건대로는 한 달 170만원을 웬만해선 벌 수 없다. 나와 한날 한 라인에 배정된 7명 가운데 5명이 2주가 채 안 돼 그만뒀다. '가난한 희망'마저 별처럼 멀어진다.

공단 담벼락 너머 연기 뿜는 여느 공장 안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첫날 풍경은 둘로 집약됐다. '공장 노동자'는 쉴 새 없이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반자동화 기계로 서 있다. 그들 머리 위 공장의 시계는 '국방부 시계'보다 천천히 간다. 그렇게 난로는 유유히 하루 1500개가량씩 완성돼간다.

이것이 어렵다, 어렵다 곡소리를 내는 중소기업들도 조금씩 살을 찌우는 비결일 것이다. 다시 짚어볼 문제지만, 모든 중소기업이 보호받을 만하거나 위약한 건 아니고, 모든 반장이 간악한 것도 아니다.

1. 단순 공정의 진실

단순 조립 노동. 안산에만 8만6천 명가량(2008년 안산시청 통계)이 일한다. 투자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자리다. 모두에게 그렇진 않겠으나, 그래서 가장 값싼 '막장 노동'이 된다. 하지만 '단순하다'가 '손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은 기술이 아닌 요령으로 일한다. 요령의 부족분은 무조건 힘으로 때워야 한다. 극도의 단순 공정은 몇몇 신체 부위만 집중적으로 노쇠시킨다. 하룻새 양손에 물집이 잡혔다. 가만히 한곳에 서서 순간적으로 허리힘까지 써가며 편심을 맞추고, 악력을 키워 심지를 올리며, 손바닥과 어깨힘으로 심지를 누르느라 고통을 느끼는 일조차 분주했다.

"멍 때려야 시간이 간다"

특히 내 바로 옆 10번 공정은 '파견 노동자의 무덤'이었다. 난로의 내부 덮개를 씌우는 단순한 일이다. 홀더를 양옆에 끼워 볼트 4개만 조이면 된다. 이렇게 단순한 일인데, 2~3일 간격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대개 드라이버는 줄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이 공정은 특성상 직접 손으로 쥐어야 한다. 무게가 있다. "팔이 마비되려고 해" "손이 펴지지 않는다"는 작은 절규가 사람마다 이어졌다. 파견 노동자는 쉽게 그만두거나 느리니까, 다른 라인의 정규직 노동자를 데려다 앉힌다. 그 또한 이튿날 파스를 붙이고 왔다.

'단순하다'는 '지겹다'와 통한다. 손에 익지 않을 경우 고통은 천천히 오밀조밀 전해지고, 손에 익으면 고통보다 더 큰 피곤함으로 잠이 쏟아진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 공포만큼 이들에게 버거운 것도 없다. 지방대를 다니다 8월 초부터 일해온 24살 정원식(가명)씨는 "A타임에는 김태희를, B타임에는 전지현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부터가 온통 음흉, 불량한 생각들에 사로잡혔다. 경기 부천에서 공고를 나온 염철수(28·가명)씨는 "멍 때려야 시간이 간다"며 "그땐 완전 (자신이) 기계예요, 기계"라며 한숨을 쉰다. 실제 라인 속도는 목표량에 맞춰 반장이 자유롭게 조정한다. '멍 때린' 채 라인의 노예가 된다. '의식'이 비집고 설 틈이 없다.

공장에 근무한 4주 동안, 생산직 노동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딱 한 번 전날 뉴스가 회자됐는데, 탤런트 이영애씨 결혼 소식이었다. 한 남성 동료가 "더 이상 돈 벌 이유를 잃었다"며 경악했다. 동경하던 연예인의 결혼에 허탈한 심정이야 그렇다치고, 그들은 알까? 이영애씨가 드라마 < 대장금 > 에서 받은 회당 출연료는 600만원 정도라는 사실. 5시간 동안 촬영한다면, 시급 120만원꼴이란 사실. 2003년 얘기다.

의지와는 상관없다. 오전 10시가 넘으면 허기가 져 텅 비고, 오후로 접어들면 지쳐 텅 빈다. 팔과 몸둥이만 라인 따라 움직이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본다. 내 공정을 자동화 설비로 바꾸려면 꽤 많은 돈이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1시간에 4천원을 받고, 평균 250~300개의 난로를 검사한다. 아주 저렴한 기계설비인 셈이다.

하루도 못 버티고 떠나는 사람들

그러니 떠난다. 텅 빈 노동, 빈곤한 노동에 기겁한다.
공고를 갓 졸업한 20살 하민우(가명)씨. 8월13일에 들어와 19일 그만뒀다. 그는 "공장이 제 일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34살 안산 출신 김정민(가명)씨. PC방과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빚을 졌다. 수개월 실직 상태로 지내다, 결국 공장문을 두드렸다. 여성과 동거 중이다. 10번 공정을 맡았다. 8월12일 출근해 사흘 일한 뒤 더는 볼 수 없었다.

옌볜 출신 중국동포인 42살 남성. 가족과 함께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올해 국적을 취득했다. 아내는 화장품 상자 공장에서 일한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의 방값을 낸다. 웃는 얼굴이 자애로운데, 여러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8월24일부터 닷새 동안 일한 뒤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사흘은 10번 공정을 맡았다. A타임이 끝나며 그는 "팔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는데, 점심시간을 앞두고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를 꺼내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았다.

20대 초반의 연인 관계로 보이는 남녀가 8월11일 나와 함께 한 라인에 배정됐다. 그 주 금요일까지 나흘을 채운 뒤 그만뒀다.

8월18일, 30대로 보이는 남성. A타임 2시간만 일하고서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도 10번 공정이었다. 반장이 작업 속도가 더디다고 채근을 좀 했다.

21살 남성. 동거 중인 여자친구(23)가 몇 달 아픈 바람에 전에 하던 공장일을 쉬었다. 9월3일 이곳으로 왔다. 그를 본 건 그날 하루뿐이다. 공기통에 심지를 끼우는 초반 공정을 도왔다.

내 위치에서 볼 수 있는 파견 노동자들의 '입출'이 대략 이러했다. 난로 라인은 작업표준서상 모두 28개 공정으로, 보통 35~40명 남짓이 울력한다. 후반 공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예고 없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다. 대략 하루 6~7명이 라인에 새로 오면 그중 2~3명이 다음날 '증발'한다.

2. 착취의 속살

그런데도 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기업은 수익을 낸다. 납득이 어려웠다. 인력회사 관리들의 말을 종합하면, A사의 생산 정규직은 140명 정도인데, 파견 노동자는 한창 많던 8월 중순 340~400명에 이른다. 기업공시를 보면 정규직은 사무직을 포함해 240여 명이다.

최저임금에 일도 고돼, 기척 없이 그만두는 이의 수를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8월 마지막주로 접어들면서 파견 노동자 자체가 급감했다. 전체 260명 정도만 조달된다는 것이다. 8월27일 라인 반장은 "50여 명 정도가 인력회사에 등록하고선, 겨우 20명 정도만 온다"고 말했다. 대학생 '알바'가 대거 빠지고, 추석을 앞둔 시점에서 단가가 센 할인마트나 택배 쪽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이다.

인력이 빠져도 목표량을 채우는 비결

그런데도 생산량은 또 큰 차이가 없다. 일일 1200~1500개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했다. 라인 가동 속도가 줄긴 하지만, 남은 자들이 다른 공정까지 바삐 수행하며 목표량에 근접시킨다. 라인이 느려도 맡은 공정이 많으면, 라인이 빠른 것과 다름이 없다. 당연히 업무 강도가 높아진다. 나 또한 8월 말 인력이 부족하자 검사 공정을 끝내고 드라이버로 나사까지 박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소했다. 반장을 포함한 정규직도 피해를 본다. 라인을 돌며 관리·지시하던 반장도 꼼짝없이 공정 하나를 도맡는다. 그는 점심을 거르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반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 파견 노동자들의 잔업 통제다. 우리 라인 반장도 잔업 거부자가 많은 날엔 '육두문자'를 쓰며 방방 뛴다. 조례 때마다 "우리 라인 근태표가 가장 지저분하다"거나 "제발 잔업을 빠질 거면 3시30분 이전에 알려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미움을 덜 산다. 잔업 못한다고 하면 즉시 관두라고 하는 라인 반장도 있다. 잔업을 빠지려면 별의별 수모와 눈치를 감수해야 한다.

당연히 파견 노동자에게 소속감이란 찾아볼 수 없다. 관두라면 관둔다는 식이다. 2시간만 일하고, 또는 오전만 일하고 가버린다. 4천원짜리 노동은 차고 넘친다. 상징적으로 이 공장 화장실을 보면, 변두리 공원 화장실처럼 더럽다. 담배꽁초가 수북하고, 휴지가 가득 널려 있다. 누구도 깨끗이 써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품질이 일정할진 알 수 없다. 다만 8월31일 밤 9시 잔업 뒤 종례를 기억한다. 반장은 "난로 3100개 가운데 3천 개가 불량으로 나왔어요. 스크루 박다 기스 나고, 라벨 비뚤어지게 붙이고…. 그거 나올 때까지 생산부장이 뭘 했냐고 그러는데, 나도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시말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는 인력이 빌 때마다 누구보다 바빴고 성실해졌다. 결국 9월 첫쨋주 야간 작업은 불량 제품의 재작업으로 대신했다. 경영진은 손해를 보았을까, 이득을 보았을까.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단가 후려치기 등 원-하청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합리를 탓한다. 그러면서 강요되는 손해분을 안으로 노동자에게 전가한다.

1분만 지각해도 30분치 시급 공제

대기업의 냉장고를 하청 생산하는 A사 역시 생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적 근태 관리들이 있다. 가령 업무 시작은 아침 8시30분이지만, 반장 조례를 8시15분에 한다. 조례가 끝나면 대체로 자기 위치에 가 부품을 정렬하거나 드라이버에 기름을 넣는다. 밤 9시 작업 종료 뒤엔 청소와 종례를 한다. 10분 안팎이 소요된다. 공원들은 실상 하루 20~30분의 공짜 노동을 하고, 사용자 처지에선 1명당 2천원씩을 버는 셈이다. 대신 노동자가 1분만 지각을 해도 30분어치의 시급을 제한다. 당근은 최소화하고 채찍은 최대화하는 메커니즘은 언제나 가진 자가 더 가질 수밖에 없는 동력이 된다.

준비운동으로 정확히 근무를 시작하는 공장이 엄연히 있다. 청소까지 근무 시간 내 공정으로 포함해둔 곳도 있다. 물론 더 인색한 기업도 많다. 시급으로 책정되는 2시간 간격의 쉬는 시간을 5분만 배정한 기업이 대표적이다. 그곳에서 일하다 온 한 파견 노동자는 "담배 하나 피울 시간이 안 됐다"며 증오했다.

일당으로 계산해 한국인에겐 5만원, 중국인 3만5천원, 동남아인에겐 3만원만 주는 공장도 있다. 이 공장은 때때로 새벽 3시까지 철야를 시킨 뒤 아침 8시에 출근하게 한다. 철야는 경영진에 이득이다. 값비싼 생산설비를 쉬지 않고 가동할 수 있고, 시급이 워낙 낮으니 수당 부담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자동차 산업이 어려워지자 파견 노동자 먼저 일괄적으로 정리했다. 이곳에서 쫓겨난 뒤 9월 초 A사에 파견 노동자로 들어온 22살 공원의 이야기다.

A사는 각기 다른 노선의 통근버스 3대로 노동자를 태워온다. 하지만 밤 9시 야근자가 많을 경우, 오후 5시30분이나 저녁 8시에 퇴근하려는 이들에겐 한 노선 1대만 운영한다. 상당수가 대중교통비를 써야 한다. 모든 라인이 잔업을 할 경우 오후 5시30분에 퇴근하는 이에겐 그조차도 없다. 결국 1천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공장 퇴근버스를 타려는 사람은 무조건 잔업을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대중교통 노선은 우회하기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난 회사버스를 타도 밤 9시에 끝날 경우 집에 가면 10시가 넘었다.

잔업과 철야가 연일 가능한 것은 '빈곤한 노동자'가 항상 넘치기 때문이다. 이달 A사에서 일한 지 3개월째가 되는 40대 후반의 정성훈(가명)씨는 잔업이 저녁 8시에만 끝나도 화를 냈다. "저녁까지 먹었는데, 9시까진 해야지 돈이 좀 모이는데, 이게 뭐냐"며 '단전'을 외쳤던 내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던진다. 많은 이들이 생활이 아닌 생존, 부유가 아닌 충족을 원한다. 그를 위해 '착취'조차 달게 받는다.

3. 침묵의 노동

근무 첫날 다섯 마디가량 말을 했다. 오전 10시30분 종이 치며 라인이 서자 "쉬는 시간이냐"라고 묻고, 낮 12시30분 종이 치자 옆 공정 중년의 정규직 여성에게 "점심시간이냐"라고 물었던 몇 마디다. 그 여성은 "응" 하면서 쏜살같이 식당으로 달려갔다. 안산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 가운데 하나다.

이후로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근무 중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파견 노동자들은 입이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을 하는 이는 대개 정규직이다. 휴대전화 통화나 문자 확인은 도덕과 상식, 인륜을 망각한 짓이 된다. 반장이나 경력 높은 정규직만 사용한다.

침묵의 노동은 일터의 행복, 연대감, 일을 통한 사회화를 일거에 잘라낸다. 몇 가지 이유가 보였다. 뜨내기 날품이 많은 탓이다. 처음 온 파견 노동자의 이름을 물어봤댔자, 그가 내일도 올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가장 값싼 파견 노동자들은 안면을 익혔거나 친해진 동료가 떠나는 걸 두려워한다. 더 좋은 일자리를 모른 채 자기만 정체돼 있다는 불안과 열패감이 있다. 실제 신입 파견 노동자가 많은 날은 공장 전체의 활력을 발견하게 된다. '동질감' 덕분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20대 여성은 며칠 만에 공장을 그만둘 즈음 이런 말을 했다. "왜 여기 사람들은 웃지도 않고, 말도 안 걸어줘요?" 그건 아마 시급으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생산 관리들의 통제다.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음악도 듣지 못하게 하는 마당이다. 침묵은 그렇게 관례화된 것이어서 파견 노동자는 첫날부터 자연스레 몸에 익힌다. 누구도 말을 잘 걸지 않기에 침묵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오후로 넘어가면 힘들어서 말을 하려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말 걸자 반장 눈치 보며 외면

이미 제 커뮤니티를 잃거나 떠나, 홀로 인력회사를 통해 들어온 뒤, 혼자 일하다 혼자 밥을 먹는 이가 상당수다. 입 없는 이의 입으로 밥이 사라지는 풍경은 슬펐다. 내가 유일하게 받은 복은, 10번 공정에 다른 라인의 7~8년차 여성 정규직이 배치돼 말을 걸어주는 것이었다. 근무 3~4주차로 접어들며 조금이나마 적응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몇 살이야?"
"35살이오."
"아이고 미안해, 반말해서."
"아, 아니에요. 저랑 동갑도 아니시잖아요."
"하하호호하…. 결혼했어?"
"아뇨."
"에구, 엄마 속 타 죽겄네."
"예.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걸 하고 있어요.) 그런데 반장은 돈 많이 받아요?"

"월급? 얼마 못 받아. 시급 좀 높고, 수당 6만~7만원인가 더 받을걸."
"일주일에요?"
"뭔, 한 달에. 그러니까 반장 말 잘 들어."
8월21일 처음 말을 걸어준 40대 정규직 여성(7년차)은 친절하고 활달했다. 하지만 이들조차 반장의 눈치를 본다. 작업 중 내가 얼굴을 보며 대화할라치면 "왜 날 보고 말해?" 하며 자세를 교정시킨다.

생산 정규직 대부분이 여성이므로 근무 중 대화도 대개 여성들의 것이다. 그 사이 넉살 좋은 20대 젊은 청년이 '대화 무리'에 쉽게 끼는 '우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휴식 또는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며 주고받는 몇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다. 시급에 대한 불만, 각 라인 반장에 대한 험담, 그리고 음담패설까지 담배 연기에 뒤섞여 더 자욱하고 질펀해진다.

비흡연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 점심시간 공장을 돌아봤다. 불 꺼진 건물 안에서 혼자 멀뚱히 앉아 있거나 탈의실에 누워 쪽잠을 잔다. 휴식조차 침묵이다.

4. 정규직과 비정규직

초반 파견 노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A사의 두 가지 단점을 들었다. "음식이 맛없다"와 "반장이 까다롭다". 대신 (정규직) 아줌마 텃새는 적다고 했다. 공장 경력이 꽤 되는 여성 파견 노동자들이 가장 반겼다. 하지만 어디든 군기반장 구실을 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라인에서도 근처 공정에서 막히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파견 노동자에게 보란 듯 소리친다. "아이구 속 터져~, 아주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네~" 식이다. 대부분의 40~50대 정규직 여성은 인자한 말년 병장과 매서운 일병의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 오지랖도 넓으시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공정의 작업자한테까지 지적을 한다. 그러면 반장이 출동해 '해결'하는 식이다.

우리 라인 파견 노동자들이 금요일 잔업을 못한다고 해서 반장이 성을 내며 오후 5시28분에 라인을 세웠다. 지난 8월21일이다. 줄 선 작업자들 앞에서 "주간 목표량을 못 맞췄는데, 금요일 밤에 약속을 잡는 게 말이 되냐"며 한참을 질책한 뒤, 다른 라인에 지원 갈 남자 4명만 나오라고 했다. 급할 때 라인별로 인력을 서로 지원한다. 품앗이하는 것이다. 하필 반장 코앞에 내가 섰다. 어이없이 나가고 말았다.

온풍기 제작 라인이다. 큰 온풍기통을 옮기고 거기에 몇 가지 부품을 장착하는 첫 번째 공정이었다. 내 작업 속도가 빠른지, 더는 온풍기통을 옮겨놓을 공간이 없을 만큼 일감이 쌓였다. 난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자 저 멀리 한 정규직 여성이 잽싸게 다가와 빗자루를 쥐어준다.

"청소해."
"예? 이따 할 거잖아요."
"그래도 해. 사람들이 싫어해."
"공장 바닥 닳겠어요, 하하하."
실소하며 난 청소를 했다. 또 다른 실소의 기억은 20대 후반의 젊은 남성 정규직이 줬다. 중년인 파견 노동자에게까지도 반말을 하는 등 자주 위압적이다. 뒤에 보니 '공공의 적'이었다. 난로에 장착할 부품을 한쪽에서 다른 파견 노동자들과 조립하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상태였다. 지게차를 몰던 '공공의 적'은 경적을 울리며 내게 소리쳤다. "야, 너 일어나서 일해." 속으로 '그럴게' 하며 자세를 바꿨다. 나도 어렵지 않게 '공공'으로 포섭됐다.

사실 이곳의 정규직과 파견 노동자의 처우는 거의 같다. 시급 4천원짜리 노동자다. 다만 정규직은 상여금 600%를 받는다. 파견은 230%다. 처우가 비슷하니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이나 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파견 노동자에겐 없다. 대신 '인간에 대한 예의'가 거의 모든 갈등의 핵심이 된다.

비정규직법이나 차별 문제는 사무직 또는 대기업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정규직을 희망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24살 정원식씨는 "내년까지 다녀 정규직이 될까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내년엔 시급도 오르고 두 달에 한 번씩 90만원가량 상여금도 나오니 안정적이란 얘기다.

에필로그

육체적 고통, 침묵의 고통, 차별 따위가 라인 따라 쉴 새 없이 전해진다. 하지만 공장 라인 노동의 진정한 악질은 같은 노동자를 증오하게 하는 데 있다. 호흡이 맞지 않는 옆 노동자가 밉다. 내 공간이 좁아지며 불편해지고, 작업을 방해받는다. 나보다 쉬운 공정만 처리하며 같은 시급을 받는 또 다른 노동자들을 인사 한 번 주고받은 기억 없이 미워한다. 시간이 갈수록 더하다.

옆의 동료를 미워하게 만드는 시스템

소화 뭉치를 장착하기 위해 스크루 두 개만 박는 8번 공정과 공기통 상단부를 고정하려고 스크루 4개만 박는 7번 공정 동료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입 파견 노동자가 내 양 옆을 차지했을 땐, 내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부드러운 기계처럼 일해주길 바랐다. 아닌 표정으로 상대를 기계로 대한다. 그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내 인간성을 파괴한다.

8월 중순은 특히 더웠다. 선풍기 몇 대만 게으르게 돌고 있다. 라인이 빠르면 땀 닦을 시간도 없다. 처마 아래 빗방울처럼 심지로, 공기통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첫쨋주가 지나자 목과 오른 팔뚝에 땀띠가 생겼다. 하지만 사실 추위가 더 무섭다고들 한다. 난로가 주력인 회사에 난로 하나 없어서 자기가 구입한 털바지에 털실내화를 갖춰입어도 춥다고 정규직들은 말한다.

9월1일 아침 8시10분, 이 회사 회장의 아들인 전무가 월례 조례를 주재했다. 그는 "올해 잘하면 최대 수익을 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며 "자부심을 갖고 경쟁력을 높여달라"고 주문했다. 강당에서 정규직과 파견 노동자가 뒤섞여 선 채로 20분 넘게 들어야 했던 연설의 고갱이였다.

하지만 그런들 파견 노동자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100억원을, 1조원을 돌파해도 시급은 주근 4천원, 야근 6천원이다. '용역'들도 모르지 않는다. 나는 다만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파견 노동자들을 앉혀주고 조례를 했다면 조금은 더 귀담아들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한 사람이 허리가 아픈지 대놓고 "끄응~" 하며 몸을 숙인다.

인력회사에서 얘기하는 월급은 대부분 월~금요일, 주근과 2~3시간의 야간 잔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러면서 때때로 주말 특근까지 해야 받는 액수다. 당초 돈 쓸 시간이 없기에 절약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그건 이들 빈곤한 노동의 유일한 장점이다.

8월20일, 조립품에 손가락을 베어 연고를 사려고 약국에 들렀다. 드디어 파스도 샀다. 이튿날부턴 목과 양어깨 부위에 파스를 2개씩 붙이고 다녔다. 거른 날이 드물다. 황량한 공장 마당에도 8월 말이 되자 결결이 바람이 불었다. ㄷ인력회사 과장이 야외 휴게소에서 "이게 무슨 냄새지? 향수 냄새가 나는데" 하며 미소지었다. 옆에 있던 염철수씨가 "이건 (사방 사람들이 붙인) 파스 냄새"라고 잘라 말했다. 또 한 번의 실소를 가을 초입 바람에 한참 흘려보냈다.

"9월5일. 햇살 따갑다. 손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일곱 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이 몹시 거칠다. 손마디와 바닥이 많이 결린다. 이조차도 몇 주 뒤엔 사라질 것이다."

운명이 아닌 실험이라 다행일까

4주간의 노동을 끝낸 다음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다시 기자로 돌아갈 수 있어서라기보다, 지난 한 달이 운명이 아닌, 오직 '실험'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공장 노동자의 손금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를 사열시키는 컨베이어벨트는 영원히 쉬지 않고 돌며, 20살 여공부터 48살 가족을 책임지는 중년 남자까지 여전히 제 손금을 원망하며 나사만 하루 11시간씩 조이게 할 것이다. 그들이 선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